1958년 작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영화 제목은 사실 잘못 번역된 것이다. 원제 <Cat On A Hot Tin Roof> 어디를 봐도 지붕 재질에 대한 말이 없다. 게다가 지붕에 까는 철판은 주석을 도금한 '함석'이고, 더 비싼 아연을 도금한 '양철'을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어쨌든 누가 봐도 걸작인 이 영화에는 대인관계의 방법에 대해 아버지와 아들이 논박을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아버지는 지평선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대농장을 일궜지만 불행하다. 그는 사람의 능력을 제대로 파악하고 효율적으로 일하는 '제도'를 만들어 사업을 키웠다. 하지만, 아들은 같이 일하는 농장주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아버지를 비판한다. 부를 얻었지만, 더 중요한 '정'을 잃어버려 가족마저 파탄에 직면했다는 논리다.
 

▲ 인디언 옥수수.
조르주 바타이유는 그의 책 <저주의 몫>에서 부를 축적한 사람은 이를 나누지 않으면 불만을 사는데, 종교나 전쟁 등의 제도가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체제를 유지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메리카 원주민 콰키우틀 족이 벌이는 '포틀래치(potlatch)'가 오히려 종교나 전쟁보다 더 인간적이라고 봤다. 포틀래치는 지도자가 잔치를 벌여 모았던 재산을 나눠주고 심지어 파괴하기까지 하는 의식이다. 어떨 때는 옆 마을과 경쟁이 붙어 누가 더 많은 물건을 부수고 불태우는지 경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포틀래치 연구자들은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콰키우틀 지도자의 행동이 마을 안에 믿음이 싹트도록 한다고 분석했다. 부도 나누고, 서로 즐겁게 놀면서 정도 쌓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는 논리다. 현대 사회에도 이런 포틀래치 경제효과는 존재할 수 있다. 북미나 유럽에서 기부하는 부자들은 그저 돈만 내지 않는다. 이들이 존경받는 이유는 진심으로 정을 나누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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