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26일, 김병훈 할아버지가 고문을 맡고 있는 김해 동상동의 한 절에서 그를 만났다. 김 할아버지의 책상 위에는 누렇게 빛 바랜 영수증 몇 꾸러미와 책자 세 권이 놓여 있었다. "어젯밤 내내 뒤져가지고 오늘 들고 온 깁니다." '소장목록'이라는 글자가 쓰인 책자를 펼치며 그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김 할아버지가 어떤 물건이든 모아야겠다고 다짐한 것은 13살 때였다. 광복 직후 경주에 여행을 갔다가 개인이 하는 박물관에 들르게 됐고, 그 곳의 허술함에 크게 실망한 것이다. 말이 박물관이지, 그저 사랑채 한 칸에 골동품을 모아둔 것에 불과했다. 그때, 소년이었던 김 할아버지의 마음은 한 가지 생각으로 부풀어 올랐다. "나도 내가 살아온 흔적을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을 모두 모아야겠다."
 
이렇게 해서 군생활 당시 썼던 숟가락, 봉급표, 각종 영수증 등을 지금까지 모아온 것인데, 그 수는 셀 수도 없을 정도이다. 물건의 종류는 1천여 종을 넘고, 어릴적부터 모아왔던 사진은 1만여 장에 이른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박물관'이다.
 
▲ 김병훈 할아버지가 1966년부터 1994년까지 모은 봉급명세서와 1962년부터 모은 각종 영수증.(왼쪽)아래는 할아버지가 모은 사진과 증명서 책자. '소장목록'책자에는 소장물품들의 사진이 담겨 있다.

김 할아버지의 소장목록 책자 첫머리에는 다음과 같은 글로 소장 의의를 밝혀 놓았다. '남에게 없는 것도/남에게 숨길 것도/나손에 들어오면/그냥은 못 나가고/등재를 못한 것도/등재를 못할 것도/그 수가 얼마인지/보아야 알 것이고/생활에 연계되어/나날이 불어간다' 김 할아버지는 "암, 내 손에 들어오면 그냥 나가는 물건이 없지"하고 자랑스레 목소리를 높인다.

 50년간 모은 영수증·계약서·서류·육아일기 등 물건 종류만 1천여가지에 사진은 1만여장 달해
"내 죽는 날까지 계속 모을 낍니더, 당연하지예"

 
약 50년 동안 모은 영수증은 기본이요, 거기에 각종 계약서, 등기부, 공증서류 등도 빼곡히 들어 차 있다. 꼼꼼하고 세심한 성격 때문에 집 안의 모든 돈 관리를 평생동안 김 할아버지가 도맡아 했기 때문이란다. 남들은 그런 김 할아버지를 보며 "부인이 참 피곤하겠네"라고 말하지만, 할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다 알아서 하니까 우리 할멈은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요. 버스 차비가 얼만지도 모른다니까요."

김 할아버지의 소장품 중에는 두 아들의 성장기를 기록한 일기장도 있다. 아이가 어떻게 울었다, 어떤 말을 했다, 어떤 주사를 맞았다 등등 자식을 키우면서 겪는 모든 일을 시시콜콜 적어 놓았다. 현재 할아버지의 두 아들은 40대이다.
 
첫째 며느리가 아이를 낳았을 때, 할아버지는 이 일기장을 건네주며 "내가 애들을 어떻게 키웠는지 한번 봐라"고 말했다. 3개월 후, 며느리가 일기장을 다시 할아버지에게 돌려주며 이렇게 말했다.
 
"아버님, 지는 이래 복잡하게 애들 못키웁니더! 다시 갖고 가이소."
 
'고향그림'이라는 제목이 붙은 사진첩을 여니, 조그만 흑백사진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할아버지가 초등학생 때부터 모은 것들이다. 그는 사진첩을 한장 한장 넘기며 "얘는 죽었고, 얘도 얼마 전에 죽었고…"라고 혼잣말을 한다.
 
군생활 당시에 찍은 사진도 가득하다. 할아버지가 군대에 간 것이 1958년도였으니, 벌써 50년이 훌쩍 넘었다. '나팔수'였던 사진 속 김 할아버지의 허리춤에는 나팔 하나가 매달려 있다. 물론 이 나팔도 김 할아버지가 보관하고 있다.
 
물건을 모으는 것 외에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일은 '무엇이든 가장 먼저 해보는 것'이다. KTX 개통 첫날이었던 2004년 4월 1일, 할아버지는 KTX를 탔다. 2005년 11월 28일 부산지하철 3호선이 처음 개통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해당 기차표와 지하철 승차권은 할아버지의 '각종 증명' 책자에 원형 그대로 담겨 있다.
 
김 할아버지는 이 많은 물건들을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일까. 2005년 12월 2일, 할아버지는 김해문화원과 약정을 맺었다. 현재 소장 중인 물건 전부를 문화원에 기증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혹시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가족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까 염려해, 가족들에게 남기는 편지는 따로 보관해놓았다.
 
손에 들어온 물건은 무엇이든 모으는 김 할아버지를 두고, 두 아들들은 "아버지 고집은 아무도 못 꺾는다"며 고개를 젓는다고 한다.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무 쓸모 없어 보이는 물건까지 다 모으니 그렇게 말할 만도 하다.
 
아마 김 할아버지는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을 기록하고 싶은 것일 테다. 당신에게 닥친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아내되, 그 흔적을 남기고 싶은 것이다. 덕분에 할아버지는 과거를 되짚으며 당시를 즐겁게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이삼십대를 겨우 지난 이들도 종종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는데, 칠십대인 할아버지는 그보다 더하지 않을까. 김 할아버지에게 과거를 추억할 수 있는 그 물건들마저 없었다면 할아버지의 노년은 지금보다 훨씬 쓸쓸했을 것이다.
 
"할아버지, 앞으로도 물건 계속 모으실 거예요?" 하고 물었다. 김 할아버지는 별 질문을 다 한다는 표정으로 대꾸한다. "당연하지! 내 죽는 날까지 계속 모을 낍니더!"
 


시조집 10권 펴낸 시조시인
2005년 '현대시조문학상' 통해 등단

김병훈 할아버지는 2005년에 '현대시조문학상'을 통해 등단한 시조시인이기도 하다. 그는 등단하기 전이었던 2000년부터 이미 매년 '살아오면서'라는 제목의 시조집을 한 권씩 펴내 2010년까지 총 10권을 완성했다. 얼마나 부지런히 글을 썼는지, 7권 이후로는 권당 1천편 이상의 시조를 싣기도 했다.
 
김 할아버지는 까만 일기장에 틈 날 때마다 시조를 끼적인다.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이나 느낌 등을 바탕으로 쓰는 것이다. 인터뷰를 하러 간 날도 "이렇게 우리가 만나니 이것도 다 시조에 영감을 준다"며 즐거워했다.
 
일기장을 채운 글들 중 할아버지가 지난 1월 23일에 쓴 '노인네 찬밥신세'라는 제목의 시조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는 "혼자 절 사무실에 남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보니 문득 나이먹은 게 서럽다는 생각이 들어 글을 써봤다"고 말했다.
 
'정신도 깜빡/약속도 못하겠고/여생이 얼마 안 돼/믿고도 못 살겠고/주머니 얇아 보여/의지도 안 될 것 같고/얼굴도 주름많아 데이트 안 되겠고/출행이 줄어드니/찾는 이 같이 줄어'('노인네 찬밥신세' 중)
 
간결하고 직설적인 글이지만, 노인들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 가슴이 뭉클해 졌다. 다음 페이지는 글을 몇 번 쓰다 종이를 찢어 버린 듯 꾹꾹 눌러 쓴 볼펜 자국만이 남아 있었는데, 김 할아버지가 웃으며 말했다.
 
"신문사에서 온다 하니 내 마음이 붕 떠서 어제는 글을 못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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