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외조부께서는 역리에 밝으셨다. 설을 앞둔 이즈음이면 외가 사랑방은 신수를 보러오는 근동 사람들로 붐볐다. 우리 가족이 살림을 났던 부산 매축지 집으로 다니러 오시면 집에 계실 틈이 없었다. 사람들 왕래가 잦은 신작로 근처로 나가 자리를 펴고 앉으면 두둑한 용돈벌이가 되었다. 그런 외조부께서 내가 태어나자 사주를 짚어보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 녀석은 여자 사준데 남자로 태어나 애가 많겠구나." 역리를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그 말씀은 옳은 것 같다. 1년 중 양의 기운이 가장 쇠한 동짓날, 어머니가 팥죽을 끓여놓고 나를 낳으셨다니 말이다. 동지는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날인데 거기에다 출생 시각까지 해가 기우는 저물녘이었으니 설상가상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지만 이제 세상은 바뀌어 여성성이 가미되지 않은 남자는 여러모로 궁지에 몰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돈 벌고 힘쓰는 남자 역할도 잘 해야 하지만 육아와 요리 같은 것에도 팔을 걷어 붙어야 한다.
 

■위기에 몰린 남성성
거칠게 구분한다면 전 시대의 남녀 역할은 추진력을 요하는 힘쓰는 일은 남자, 지구력과 섬세한 배려를 요하는 일은 여자의 몫이었으나 이제 그 경계는 무너지고 있다. 남성성의 대명사였던 공격성과 정복욕 따위는 오히려 거세되어야 할 병적 요인으로 추락해 있다. 힘쓰는 일은 기계가 대신해주는 반면 섬세한 운용을 요하는 여성적 역할은 정보산업과 서비스산업의 팽창으로 날로 증가추세에 있다.
 
지금은 남성성의 위기 시대고 그 문제의 핵심은 남자의 일은 대부분 여자가 감당하지만 여자의 일은 대부분 남자가 감당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최근 나는 여성 4대와 동거하면서 그것을 실감하고 있다.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어머니, 아내와 딸, 그리고 손녀까지 여성 4대에 둘러싸이는 행복한 신세가 되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설거지와 청소와 애 돌보는 일 모두 낙제점이었다. 나는 그녀들을 통해 우리 현대사의 한 단면을 본다.
 
우리집 여성 1대가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 세대였다면 2대는 아들을 기다리는 중에 낳은 괄시받는 딸로 자랐고 3대는 깨우친 부모에 의해 겨우 평등이 실현된 세대, 4대는 여성 우위의 세월을 살아갈 세대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 가장 요지부동인 것이 어머니여서 정신 맑으실 때마다 당신의 손녀에게 '그래도 아들 하나는 더 낳아야지' 하고 말씀하시고 지난 대선 때는 여자가 어떻게 대통령을 하겠느냐는 막말(?)까지 하셨다.
 

■남존여비? 여존남비?
1925년 <신여성> 2월호에 남존여비가 아닌 여존남비를 주장한 글이 실려 있다. 생물계에서 생식의 완성자는 수컷이 아닌 암컷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생식의 불어군이(부엌)에 맨 처음 불을 땐 이는 수놈입니다. 그러나 최후에 훌륭한 산 물건(活物)을 만들어낸 이는 암놈입니다. 생물의 제일 큰 사명인 생식의 무대에서 근본이 되고 두목(頭目)이 되는 것은 언제든지 암놈이었고 수놈은 다만 여졸가리가 되고 심부름꾼이 되는데 지나지 못합니다"라고 했다.
 
고대 사회는 모계중심의 사회였으나 서기 전 7세기께 금속문화의 도래로 남자의 노동력이 중시되면서 그 지위가 바뀌었다는 주장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구려 신라 고려를 거치는 동안 여성에 대한 특별한 제약이 없었으나, 조선이 유교적 사회질서를 확립하는 방편으로 여성을 차별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가 하면 최근 한 두 자녀 갖기가 보편화되면서 남아선호가 더 심해졌다는 주장도 있다. 여성과 남성, 그것은 우열의 관계가 아닌 불완전한 반쪽의 관계일 것이다. 서로의 결여된 나머지 부분을 상대에게서 찾아 짝을 맞추는 것, 나의 넘침이 너의 부족이요 나의 부족이 너의 넘침이 되는 이 오묘한 음양의 조화가 우주만물을 이루는 법칙이 아니겠는가.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