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1년 중 최고의 날은 뭐니 뭐니 해도 설날이었다. '일 년 내내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이 있지만, 아이들은 나이도 한 살 더 먹고 세뱃돈도 받을 수 있는 설날이 더 신났다.
 
섣달 하순께가 되면, 한 해를 보내고 맞이하는 집안의 일손이 분주했다. 아버지는 온 집안의 문을 떼어 냈다. 한 해 동안 묵은 창호지는 입 안 가득 머금은 물로 푸푸 뿜어 뜯어내고, 새 창호지를 바르고 문풍지까지 붙여 환하게 만들어 다시 달았다. 그리고 방에 불이 잘 들라고, 아궁이 고래와 굴뚝에 낀 그을음을 긁어내어 따뜻한 온돌로 새해를 준비하셨다.
 
어머니는 이불 호청을 말끔히 씻어 대청마루에 펴놓고 보송보송 꾸미셨다. 강정과 유과도 만들어 온 방에 깨끗한 달력을 깔고 바삭하게 널었다가, 상자에 켜켜이 담았다.
 
설을 며칠 앞두고는 방앗간에서 흰 가래떡을 해 오셨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가래떡을 뚝 잘라 먹는 맛이라니…. 대청마루에 삼베를 깔아 가래떡을 죽 늘어놓고 그 위에 다시 삼베를 덮어 떡이 적당히 굳으면, 한석봉 어머니처럼 밤새 동글동글 떡을 썰어 준비해 두셨다.
 
수세미가 귀했던 시절, 우리 형제들은 비누칠 한 짚으로 아버지 어머니 고무신을 뽀얗게 씻어놓았다. 목욕탕이 없었던 시골마을이라, 가마솥에 뜨거운 물을 가득 데워 큰 고무통에 받아놓고 고방(광)에서 차례대로 묵은 때도 씻어냈다. 목욕 차례를 기다리는 것도 설을 맞이하는 설레임이었다. 마당도 쓸고, 집안 구석구석의 거미줄도 걷어내고, 장날에 나가 새 옷이랑 양말을 사오면, 설 맞이 준비가 다 된 셈이었다.
 
섣달 그믐밤이면 언니, 동생, 사촌, 육촌 언니 오빠들까지 함께 모여 묵은 세배를 다녔다. 동네 맨 위에 있던 일가 아지매 집부터 시작해 온 동네를 돌며 묵은 세배를 다니던 기억은 지금 돌이켜 봐도 마냥 즐겁다. 집안의 불은 새벽이 올 때까지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섣달 그믐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고 하여 억지로 버텨보았지만, 나는 깜박 잠이 들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래서 아침이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거울을 보며 눈썹부터 확인하기도 했다.
 
설날 아침, 큰댁에서 집안 어른들께 드리는 세배는 우리 집안의 가풍에 따랐다.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작은아버지와 작은어머니께는 방문 밖에서 세배를 드렸고, 5촌 이상의 아재와 아지매부터는 방안에서 세배를 드렸다. 이 어른들이 함께 앉아 계시면 방안에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몇 번은 들락날락 했다. 어렸을 때라 덕담보다는 세뱃돈에 마음이 더 쏠리곤 했다. 아이로서 몫돈을 마련할 수 있는 유일한 날이 설날 아니던가. 세뱃돈을 얼마나 받았는지 서로 비교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세월이 흘러 함께 세배를 다녔던 형제들, 사촌, 육촌 언니 오빠들의 자녀들이 벌써 결혼할 나이가 되었다. 집안의 문은 더 이상 창호지를 해마다 갈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없어졌다. 고무통에 물을 받아 추운 고방에서 덜덜 떨며 목욕하던 기억은 먼 원시시대 이야기이다. 따로 설빔을 차려입지 않아도 옷장에는 옷이 넘쳐난다. 떡집에서는 가래떡을 기계로 썰어주고, 강정과 유과는 돈만 주면 살 수 있다. 더욱이 요즘 아이들은 강정이나 유과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피자나 햄버거, 치킨에 더 열광한다. 그을음을 긁어낼 필요가 없는 가스나 기름보일러는 온 집안 고루고루 따뜻한 온도를 전해준다. 편리하다.
 
그러나, 그 편리한 문명 속에서도 데워지지 않는 '삶의 온도'가 있다. 풍요 속의 허전함 같은 것이다.
 
고작 30~40년 전 우리 삶의 모습이 어느새 추억이 되어버렸다. 이제 겨우 지천명을 앞둔 나이가 되었지만, 어릴 적 설날 추억이 아득히 먼 옛일 같다. 하지만 그 시절을 떠올리면 늘 마음 한 켠이 따뜻해진다. 그 추억의 힘으로, 또 다른 설렘으로 다가오는 설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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