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통찻집 북소리의 별미 연잎밥은 오신채와 고춧가루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나물 특유의 아삭한 질감과 향을 살린 10가지 밑반찬과 함께 차려진다. 사진/ 박정훈 객원기자 poonglyu@naver.com
너무 익숙해서 그 진가를 몰라보는 경우가 더러 있다. 지난해 말 취재차 김해시와 자매결연을 한 도시인 일본 후쿠오카현의 무나카타 시를 방문했다. 문화해설사인 무라카와 씨는 하루종일 지친 기색도 없이 무나카타 시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었다. 가야문화에 관심이 많은 그는 자비를 들여 두 번 김해를 방문했다고 한다.
 
그에게 김해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김해공항에서 김해시로 들어오는 경전철에서 바라본 풍경이라 했다. 후쿠오카에서 출발한 비행기로 바닷길을 건너고, 경전철로 낙동강과 김해평야를 거쳐 김해시가지로 진입했을 때 펼쳐지던 해반천, 봉황대, 수로왕릉, 대성동고분군, 구지봉, 국립김해박물관의 모습을 그는 마치 그림을 그리듯 묘사했다. 그리고 그 감동을 '타이무스릿푸(타임슬립)'라는 한마디로 압축했다. 그것은 2천 년 전 가야문화와 일본의 야요이문화가 교류하던 현장을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한 것에 대한 감동의 표현이었다. 뜻밖의 대답이었지만 속으로 기대했던 답이기도 했다. 그날 밤 무라카와 씨와 나는 꽤 많은 술을 마시고, 그보다 훨씬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2년 넘게 취재를 위해 김해를 다니지만 무라카와 씨가 보았던 그 광경은 지금의 내게도 경이롭게 다가온다. 특히 경전철이 개통되고 새로운 조망선이 확보된 이후로 감동은 배가 되었다.
 
▲ 김해도서관과 수로왕릉을 잇는 '가락로93번길'에 자리를 잡은 전통찻집 북소리.
경전철 수로왕릉역 2번 출구를 나와 봉황교를 건너면 김해도서관이다. 입지 하나 만큼은 전국 최고가 아닐까 싶다. 김해도서관에서 수로왕릉에 이르는 500여m 남짓한 길이 '가락로93번길'이다. 이 좁고 오래된 길은 다행스럽게도 개발의 아수라장에서 살짝 비켜나 있다. 아마도 문화재 보호를 위한 규제 때문일 것이다.
 
김해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간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없이 이 길을 선택한다. 땅 위로는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땅 아래에는 2천 년 전 이 땅에서 살았던 가야인의 흔적이 잠들어 있다.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이 이렇듯 절묘하게 오버랩 되고 사이좋게 공존하는 공간은 드물다. 그저 너무 익숙해서 이 길이 가진 진가를 몰라볼 따름이다.
 
▲ 강정례 대표가 차려내는 연잎밥상은 주인장을 닮아 수수하면서도 정갈하다.
언제부턴가 이 아름다운 길에 아담한 2층 건물의 전통찻집이 자리를 잡았다. 콘크리트가 그대로 노출된 외벽에 결이 살아있는 나무 대문. 기존 건물의 내부와 외부를 전부 리모델링 했건만, 이 거리와 그렇게 잘 어울릴 수 없을 뿐더러 이미 오래 전부터 터를 잡고 있었던 것 마냥 자연스럽다. 누구의 안목인지는 몰라도 참으로 현명하고 탁월한 선택이다.
 
그런데 '북소리'라니 왠지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아울러 전각을 활용한 로고 또한 눈에 익다. 대체 무슨 영문일까? '설마…' 하며 나무 대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역시나!'였다. 반가운 얼굴이 손님을 맞는다. 못 뵌 지 족히 5년은 흐른 것 같은데, 북소리의 강정례 대표는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사연인즉 이렇다. 북소리는 부산에서도 가장 번화한 서면에서 20년 넘게 자리를 지켜왔던 전통찻집이다. 인근에 있던 동보서적과 더불어 서면에서는 몇 안 되는 '문화적 쉼터' 역할을 했다. 동보서적 앞에서 만나 북소리에서 차 한잔 하는 것은 마치 정해진 순서인 듯 자연스러운 행보였다. 이런저런 모임의 단골 장소로도 활용되곤 했다. 그렇게 청춘의 한 때를 보내던 곳이 북소리다.
 
강 대표는 서면 북소리를 오랜 단골에게 넘기고 2년 전 김해로 옮겨 왔다. 김해에 살고 있는 아들과 딸의 성화에 못이겨 내린 결정이었다고 한다. 사라진 흔적을 '추억'이라고 하건만, 북소리가 수로왕릉 앞에 자리 잡은 것을 보니 되살아나는 추억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니 내가 '가락로93번길'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공간은 주인장을 닮아 수수하면서도 정갈하다. 너른 창 너머로 수로왕릉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2층 전망이 좋다고 해서 올라가려 했더니 이미 만석이란다. 1년 8개월 만에 북소리는 이미 김해의 문화·예술인들의 단골 찻집이 되었다. 점심시간이면 별미를 찾아 온 손님들로 슬그머니 북적거린다.
 
전통찻집에서 별미라니? 부산 서면에서는 '찻손님' 만으로도 그럭저럭 유지가 됐는데 김해서는 차만 가지고는 운영이 어렵더란다. 그래서 생각한 식사 메뉴가 연잎밥이다. 차만 다려주던 주인장의 음식 솜씨까지 보게 되다니, 추억이 부활할 뿐만 아니라 업그레이드된 셈이다.
 
대체 어떤 밥상이 차려질지 자못 궁금하다. 잠시 후 반찬부터 차곡차곡 깔린다. 반찬만 10가지. 1인분에 7천 원인 밥상 치고는 제법 후덕하다. 그런데 차려진 밥상을 보니 색깔이 낯설다. 온통 녹색과 흰색 그리고 갈색이다. 붉은색이라고 해봐야 '대저토마토' 몇 조각이 전부다. 요즘은 절에 가서 '절밥'을 받아도 이런 밥상 만나기 어렵다. 파, 마늘, 부추 등의 오신채를 비롯해 고춧가루조차 일절 사용하지 않은 밥상이다.
 
'암만 그래도 이렇게 무심한 밥상으로 밥장사를 하겠다는 건 무모한 선택이 아닐까?' 하며 젓가락을 들었다. 무심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콩나물과 시금치나물부터 손이 갔다. 아삭한 질감과 특유의 향이 살아있다. 살짝 데친 콩나물과 시금치의 물기를 정성껏 뺀 덕분에 특유의 아린 맛이 없다. 옅은 소금 간이 숨은 단맛을 끌어냈다. 무심하기에 오히려 제대로 된 나물이다. 나물은 기교나 레시피가 아닌 정성으로 만드는 음식이다. 재료가 좋으면 데치는 정도와 물빼기만 잘 해도 충분히 맛있다. 갖은 양념 따위는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따름이다.
 
나물 맛을 보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반찬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다. 고춧잎과 녹찻잎 그리고 울릉도 취나물로 만든 장아찌는 그야말로 별미다. 깍둑썰기한 무는 오디효소와 된장으로 맛을 냈다. 겨울무의 단맛과 오디효소가 각별한 궁합이다. 우거지를 넉넉하게 넣고 재래된장으로 한소끔 끓여낸 된장국은 약간 짜기는 해도 구수한 된장 맛에 숟가락이 쉬 멈춰지질 않는다.
 
반찬 하나하나의 맛과 질감 그리고 향을 음미하며 먹다 보니, 어느새 연잎밥이 사라지고 반찬 그릇이 하나둘 비워졌다. 고기 한 점 김치 한 보시기 없는 밥상이지만 충분히 맛깔나고 먹는 즐거움까지 더한다.
 
식사를 끝내고 나니 후식으로 진하게 달인 대추차 한 잔을 내어 준다. 반갑고 또한 그리운 맛이다. 서면 북소리 시절, 가난한 청춘들이 몇 시간씩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강 대표께서는 싫은 내색도 없이 서비스로 대추차 한 잔씩을 주시곤 했다.
 
▲ 부산 서면 북소리 시절부터 이어져온 대표 메뉴 대추차는 반갑고도 그리운 맛이다.
식사를 끝내고 나오니 봄볕이 따사롭다. 그런 밥상을 받았으니 속이 편하지 않을 리가 없다. 적당히 노곤하고 적당히 배가 부르다. 기분 좋은 포만감이다. 벚꽃이 지고 난 가지에 돋아나는 푸른 기운이 새삼스럽다. 2천 년 전 가야의 역사 위에 작지만 의미 있는 내 추억이 한 겹 덧씌워지니 모든 것이 그저 아름답게만 보인다.
 
'가락로93번길'은 오늘도 안녕하다. 그 길 위로 나지막이 북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김해가 궁금하다면, 나는 말없이 그를 이끌어 이 길을 걸을 것이다. 그리고 시장기가 돌면 북소리에서 연잎밥 한 그릇 대접 하련다.

▶메뉴:연잎밥(7천 원)
▶위치:김해시 봉황동 392-5
▶연락처:055-337-1133





박상현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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