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 양파껍질, 연지, 오미자, 오배자, 울금, 익모초, 치자, 홍화, 감국, 계피, 꼭두서니, 댓잎, 메리골드…. 꽃이든, 나무뿌리든, 풀잎이든 식물은 모두 본래의 색을 가지고 있다. 자연적으로 색을 가지고 있는 식물은 모두 천연염색의 재료, 염재가 된다. 우리 민족이 천연염색에 사용해 온 염재는 200여 종이 넘는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웬만한 식물들은 모두 염재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명주에 곱게 물들여진 은은한 색에 시선을 빼앗겼다면, 그것은 그 색을 선사한 자연에 우리의 마음이 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송귀자(60) 씨는 진례면 초전리 448의 1에서 명주에 천연염색을 들이며 그 은은한 색에 빠져 사는 천연염색가이다.

▲ 햇살을 가득 품은 봄바람에 나부끼는 고운 명주에서 꽃잎과 풀잎이 후두둑 떨어질 것 같다. 송귀자 씨는 염색할 때 가장 행복하다. 박정훈 객원기자 poonglyu@naver.com 

갖가지 고운 색 물들여 잘 정리된 명주
탐스러운 옷이며 가방·신발·생활용품
쪽물 들인 천 나부끼는 마당 너머
작업실과 염재실·전시실 가득 채워

"진례가 고향입니다." 첫인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김해 태생이냐고 묻는 질문에 송귀자는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이 미소 짓는다. 그는 태어나고 자란 돈담마을에 천연염색공방 '초언'을 열었다.
 
공방 대문을 들어서니 마당에 쪽물을 들인 천이 널려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대문 쪽에서는 작업실이 먼저 눈에 띈다. 작업실 안쪽에는 염재와 천을 보관하는 염재실이 있다. 작업실 옆은 전시실이다. 그가 작품들을 전시하고 손님을 맞는 곳이다. 옷, 크고 작은 가방, 신발, 생활소품, 갖가지 고운 색으로 물들인 명주가 잘 정리돼 있다. 작업실과 전시실 옆에 살림공간이 따로 있다.
 
그는 진례에서도 이름난 큰 부잣집에서 6남매 중 넷째로, 3명의 딸 중 둘째로 태어났다. 쌀농사를 크게 지었던 아버지는 넉넉한 성품으로 일가친척까지 살뜰하게 거두었고, 마을에 들어선 걸인들까지 배불리 먹여 보냈다. 딸들을 특별히 사랑했는데, 옷이며 신발은 부산 광복동까지 가서 사 왔다. 겨울 부츠 하나를 살 때도 몇 번씩 들었다 놨다 하며 가벼운지, 신기 편한지 살펴볼 정도로 세심했다. 어머니는 바느질에 음식솜씨까지 두루 갖춘 분이었다.
 
"형제들 중에서 제가 부모님의 가장 좋은 점만 골라 닮았다고들 합니다. 성격은 아버지를, 손재주는 어머니를 닮았거든요. 너무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죠." 어머니의 손재주를 물려받은 그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고, 한국일보에서 주최한 미술대회에서 입선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재주 많은 딸을 미술대학에 보내 화가로 만들고 싶어 했다.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미술학원에도 보내주고, 미술대학 등록금까지 미리 마련해둘 정도였다. "제가 철이 없었죠. 남들은 가고 싶어도 못가는 미술학원을 보내줬는데도 저는 농땡이를 쳤지 뭐예요. 그림은 안 그리고 리본공예나 종이공예를 기웃거렸답니다. 제가 어려서 잘 몰랐는데, 결혼해보니 그때서야 알겠더라구요. 아버지가 얼마나 훌륭한 분이셨는지…." 그는 이미 고인이 된 아버지를 잠시 그리워했다.
 
▲ 황금색과 갈색이 섞인 붉은색의 메리골드.
결혼하고 난 뒤, 부산과 김해 시내 쪽에서 살다가 1998년 고향인 진례면으로 돌아왔다. 몇 가지 일로 집안 우환을 겪느라 실의에 빠져 있던 그를 보다 못한 아버지가 다시 고향으로 데리고 온 것이다. 염색을 처음 만난 것이 그 당시였다. 울적해하는 며느리가 안타까웠던지 시어머니가 '옷 해 입어라'며 장롱 깊이 '모셔두었던' 삼베모시를 내주었다. 그는 삼베모시에 친정어머니 흉내를 내어 어찌어찌 염색을 하고 옷을 지어 입었다. "그 옷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며 그는 옷을 꺼내 펼쳐보였다.
 
그 옷을 입고 부산진시장에 볼일을 보러 갔을 때였다. 진시장은 한복이며 이불 등 혼수 전문상가가 있는 곳이다. 송귀자는 그곳에서 갖가지 색으로 물들인 고운 한복 천을 보았다. "그 순간, 아 이런 세계가 있었구나,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게 느껴질 정도였지요. 그때 그 고운 색의 한복 천을 보면서 첫눈에 반해버린 뒤 지금까지 명주나 면에 여러 가지 색을 물들이고 있어요. 황토나 감물염색보다 이쪽이 저한테 더 맞아요. 색깔도 더 예쁘죠?" 그가 진열해 둔 명주를 꺼내 펼쳐 보였다. "이건 꼭두서니, 이건 홍화, 치자, 댓잎, 쪽…." 붉고 노랗고 푸른…. 아니다, 그런 선명한 색이 아니라 더 은은하고 고요한 느낌이다. 홍조 띤 아기의 볼 같은 분홍색도 있고, 저녁 산마루에 걸린 놀 같은 붉은 색도 있고,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가을하늘 같은 쪽색도 있다. "원래부터 좋아하던 색인데 염색을 하면서 더 좋아하게 됐어요. 쪽물에 담갔다가 끄집어 낼 때, 산소가 산화되면서 이런 쪽색이 나타나는데, 그 순간이 제일 행복해요." 그는 쪽색을 가장 좋아한다며 바닥에 명주 한 자락을 펼쳐보였다. 전시실 바닥에, 푸른 하늘이 펼쳐졌다.
 
"고운 한복감에 한번 마음을 빼앗기고 나니 염색을 직접 해봐야 겠더라구요. 그렇게 시작된 거죠." 염색이 좋아서 시작한 그를 말릴 식구들은 없었다. 아니, 적극 권장했다고 하는 게 맞겠다. 남편도 아들도 그를 옆에서 많이 도와주었다. 아들은 어머니를 위해 쪽도 직접 심었다. 취미 삼아 염색을 10여 년 하는 동안, 그를 힘들게 했던 집안 우환도 점차 잊혀졌다.
 
"다 말할 수는 없지만, 이러 저런 안 좋은 일들이 많았어요. 염색을 하는 동안 그 상처들이 치유되면서 다시 행복을 되찾았습니다. 세월이 약이 됐고, 염색이 또 나를 위로해줬지요. 햇빛알레르기가 있었는데, 천연재료로 염색을 하고 그 천으로 옷을 해입고 하는 사이에 알레르기도 싹 없어졌고요. 몸도 마음도 정말 행복해요."
 
▲ 천연염색을 한 천으로 만든 가방, 파우치와 스카프.

지난해 5월 공방 '초언' 열고 본격 작업
은은하고 고요한 천연염색 매력에 흠뻑

혼자서 염색을 하던 그는 2010년부터 신라대 전통염색연구소에서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다. 교수들이 들려주었던 "염색은 마음에서부터 물을 들여야 하는 것"이라는 가르침도 새겨들었다. "염색을 할 때는 욕심을 내지 말고,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해요. 잘하려고 욕심을 낼수록 색이 더 진하게 나오거나 연하게 나오는 등 마음과는 다른, 엉망이 된 색이 나오지요. 마음부터 물들여야 한다는 건 그런 의미랍니다."
 
그는 지난해 5월, '초언'이라는 예쁜 이름의 공방을 열었다. "내가 염색을 너무 좋아하니까, 아들이 '엄마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해보라'며 작업실을 만들어줬어요. 작업실을 만들 때 아들은 퇴근하고 돌아와 직접 선반을 짜고, 황토 칠도 했어요. 구석구석 아들 손이 닿았죠. 전시실은 인테리어 일을 하는 조카가 직접 디자인을 해줬어요." 아버지의 성품을 물려받아 일가친척을 고루 챙겨 온 그였기에, 그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니까 아들 뿐 아니라 조카까지 달려와 일사천리로 일을 돌봐준 것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뜨개질 귀신' 손재주
부산진시장서 한복 천에 첫눈에 반해
염색 세계 뛰어든 지 10여년 훌쩍


그는 아침에 집안일을 마치고 나면, 작업실로 출근해 오전 내내 염색을 한다. 점심 무렵 염색일이 끝나면, 몸을 씻고 곱게 화장도 한다. 전시실로 찾아오는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는 것이다. 차도 한 잔 마시고, 마당에서 키우는 꽃밭도 돌본다. 오후에는 건강을 위해 산책도 하고, 저녁에는 수도 놓고 뜨개질도 한다. 어렸을 때부터 '뜨개질 귀신'이라 불렸던 그였다. 한 달에 한번쯤은 작정을 하고 시장과 백화점 등지를 돌며, 디자인·색채 감각 공부를 한다.
 
그의 특기는 푸른빛을 내는 쪽 염색을 반복해 검은 색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쪽으로 8번, 가자로 2번, 울금으로 2번, 도합 12번 염색을 해야 한다. 1주일 정도 걸리는 과정이다. 신라대 조경래 전통염색연구소장은 그의 쪽 염색을 높이 친다. 조 소장은 "내가 가르쳐준다고 이런 색이 나오겠느냐. 타고 났다"며 그를 칭찬했다고 한다.  
 
그는 어떤 색을 만들어내 마음부터 물들일 것인가를 지금 이순간도 늘 생각한다. 그래서 공방 이름도 '초언'이다. 풀 '초(草)' 어찌 '언(焉)". '풀로 어떻게 염색할 것인가?'라는 의미이다.

>> 송귀자
김해공예협회 회원. 신라대 전통염색연구소 전문가과정 11기.
전시회 참여:2011년 <진묵현현 묵색전(盡墨顯玄 墨色展), 부산 디자인센터> <Antenna complex 북경전>(북경 주재 한국문화원)
2012년 <걸지 말고 들고 나가라>(상해 주재 한국문화전) 2013년 <초색녹연 녹색전(草色綠煙 綠色展) 부산 디자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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