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끝자락이 워낙 길었던 터라 두꺼운 옷을 넣었다 다시 꺼내기를 반복하는 동안 도둑맞은 것처럼 봄이 사라져버렸다.
 
봄의 민낯을 볼 겨를도 없이 날카로운 햇살로 무장한 여름과 대면하고 보니 무엇이든 느닷없고 갑자기 닥치는 것들과의 만남은 반갑기보다는 어색하고 불편하다. 사람들과의 부침이 좀 더 세련되고 매끄러웠다면 그 불편함이 훨씬 덜 했을 터인데 새삼 나의 모난 까칠함과 낯가림이 후회스럽다.
 
선생님, 선생님은 갑이에요? 을이에요? 그 느닷없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여태껏 내가 가장 맹목적으로 열중했던 것으로부터 갑자기 현기증을 일으킨 것처럼 혹은 매운 여름볕이 나의 정수리를 내리꽂는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리고 멀미가 날 것 같았다.
 
나는 과연 이 복잡한 자본주의 사회 구조 속에서 '갑'의 모습으로 살았는가, '을'의 모습으로 살았는가. 아니면 갑이면서도 을이고 을이면서도 갑인, 좀 더 다층적인 이해관계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인가.
 
갑의 횡포로 시작된 을의 울분이 무섭게 폭발하는 요즘이다. 깊은 유교 사상에 근간을 둔 우리 사회에서 약자는 참는 것만이 미덕이라 여겼고 그 미덕은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상, 하 수직적인 종속관계를 더욱더 굳건히 옭아매는 올가미가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관계가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면서 조금만 더 뒷걸음질 치면 낭떠러지라는 것을 인식한 '을'의 분노는 어쩌면 너무나 정당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곪은 고름은 터뜨려야 아물고 그 자리에 새 살이 돋듯 억눌렸던 그들의 목소리 또한 진즉에 터져 나와 치유의 수순을 밟았어야 옳았다. 그랬다면 자신이 을이라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꼈을 허탈감이 조금은 덜 했을 것이다.
 
갑의 횡포의 압권은 누가 뭐라고 해도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파문이다. 한 나라의 대변인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권력과 지위를 이용해서 어린 여성에게 입에 담기도 민망한 추태를 부렸다는 것은 갑의 횡포를 넘어선 국가적인 망신이다. 그 스스로 과거 칼럼에서 청와대 대변인은 대통령과 정권의 수준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얼굴이고 분신이라고 밝힌 바 있듯이 지금 우리 한국사회의 계층적 수준이 이것밖에 안 된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 심히 안타깝고 씁쓸하다.
 
이처럼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갑들의 횡포를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그들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부당한 권력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는 헌법 조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단지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가진 것이 조금 많다는 이유만으로 자기들만의 특권의식에 사로 잡혀 비열하고 추잡하게 자신의 열등감을 해소하고 있는 것이다. 갑 을 병 정 무 기 경 신 임 계. 갑과 을 뒤에도 무수한 또 다른 을들이 곶감처럼 줄줄이 늘어서 있다. 지금은 선두에 선 갑과 을밖에 보이지 않지만 지금처럼 부당하고 불평등한 현실이 지속된다면 먹이사슬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는 또 다른 모습의 '을'들이 두더지 마냥 툭툭 튀어오를 것이다.
 
'등라계갑(藤蘿繫甲)'이라는 말이 있다. 등라는 넝쿨(乙木)인데 이는 제 스스로는 절대 높은 곳으로 오를 수 없지만 큰 나무(甲木)에 의지해서 오르면 높은 곳까지 이를 수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때 갑은 그런 을을 위해서 마땅히 자신을 대 주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이 세속에서와는 다른 자연계의 갑을 관계다. 수직적 관계가 아닌, 수평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발전시킬 수 있는 상생의 관계. 언제나 자연은 인간의 스승임을 절감한다.
 
고백하건대 나도 '갑질'을 심하게 하는 곳이 있다. 바로 우리 아이들에게. 부끄럽고 또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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