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5일 손자 손녀를 데리고 어린이 공원으로 놀러 갔다. 천진난만하게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사람들의 얼굴에 저마다 미소가 가득했다. 아이들! 얼마나 좋은가. 그런데 우리나라 출산율이 낮아 걱정이라니…. 우리나라의 신생아 출산율(인구 1천 명당 신생아 수)을 2009년 기준으로 보면 OECD 국가 평균 1.7에 크게 못 미치는 1.149로 거의 꼴찌 수준이었다. 젊은이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출산을 꺼려하니 머잖아 완전 고령사회가 될까봐 걱정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정작 아이를 간절히 갖고 싶은데 뜻대로 안 되는 안타까운 사연도 있다. 그랬던 A가 문득 생각난다.
 
그녀는 오래전 나에게 심장수술을 받았던 사람이다. 나는 그녀에게 크게 빚진 자이다. 의사와 환자 사이에 빚은 무슨 빚인가? 하겠지만 물질로 가늠할 수 없는 마음의 빚도 있는 것이다. 그때 나는 심장수술 집도를 시작한지 고작 6개월 남짓 되어 아직 많이 미숙할 때였다. 심실중격결손증(심장의 심실중격에 큰 구멍이 있는 기형)을 갖고 태어난 그녀는 어릴 적부터 수술을 권유받았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결혼을 앞두고서야 큰 결심을 했다. 건강한 몸으로 아기를 갖고 싶다고….
 
그녀의 심장엔 이미 2차적 변화가 심했다. 단순히 구멍을 메울 수술이 아니었다. 구멍 주위에 있는 판막이 손상을 입어, 이것을 도려내고 인공판막을 끼우는 판막치환수술까지 필요한 상태였다. 인공판막에는 2가지 종류가 있다. 특수한 금속으로 만든 기계판막은 평생 쓸 수 있지만 수술 후 항응고제를 매일 먹어야 한다. 판막 주위에 피가 엉기거나, 엉긴 핏덩이가 파편이 되어 뇌경색을 일으키는 일을 예방하기 위해서다. 그러니 자녀를 갖기 원하는 여성에게는 권장되지 않는다. 반면, 동물(소나 돼지)의 조직으로 만든 판막은 항응고제를 먹을 필요가 없어 출산이 가능하다. 하지만 내구성이 약해 대개 10년이면 재수술을 받아야 한다. 기계판막을 쓸 것이냐? 조직판막을 쓸 것이냐? 의견이 분분했지만 그녀는 조직판막을 선택했다. 자녀를 갖고 싶다는 소망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술실에서 그녀의 심장을 들여다보았을 때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대동맥의 직경이 너무 작아 생각했던 조직판막을 도저히 끼워 넣을 수가 없었다. 경험이 일천했던 나는 이래볼까 저래볼까 망설이다 결국 손쉬운 기계판막으로 치환하고 말았다. 그래도 그녀가 그것으로 만족했다면 정녕 별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가 대뜸 물었다. "선생님, 저 임신하면 정말 안돼요?" "그건 너무 위험해요!" 나의 단호한 대답에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돌아섰다. 아기를 갖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을까? 사귀던 남자는 떠나버렸다. 수술을 받고 건강이 회복됐다고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더 고달파졌다. 그 이후 나를 찾아오지도 않았다. 이 일은 고스란히 내 마음에 큰 빚으로 남았다.
 
이렇게 사연 깊은 여인이 최근 나를 찾아왔다. 나는 얼른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기억 속의 그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어디에서도 지난날의 어두운 그림자를 찾아 볼 수 없었다. 청진기를 갖다 댔다. 그녀의 가슴에서 울리는 아주 규칙적인 심장의 박동 소리는 아름다운 음악과 같았다. "건강하시군요!"하며 청진기를 내려놓자마자 그녀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미국에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요. 결혼도 했어요. 아이가 둘이나 있답니다." 참 오랜만에 고국 땅을 밟았다며 깔깔거리며 웃었다. 아이들은 그녀의 '행복바이러스'라고도 했다.
 
아이가 둘씩이나 있다고! 나는 놀라서 입이 딱 벌어졌다. 어떤 사람과 결혼을 했으며, 어떻게 아이들을 가졌는지, 지금은 무슨 일을 하는지 물어 보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지만 나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녀는 25년이나 묵은 나의 큰 빚을 탕감해 주려고 일부러 찾아온 천사였다.
 
A처럼 힘들게 자녀를 가지는 사람도 있는데 멀쩡한 젊은이들이 출산을 꺼리는 현실이 안타깝다. 그러나 아주 비관적이지만은 않다. 2009년 이래로 우리나라 출산율이 꾸준히 늘고 있다는 통계가 있다. 2012년에는 출산율이 1.30을 기록하면서 초저출산국 탈출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희망적인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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