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회가 마을잔치였고 축제였던 시절, 노래를 잘 불렀던 한 소녀는 '스타'가 되곤 했다. 교장선생님이 소녀를 번쩍 안아 운동장 조례단상에 세워 놓으면, 소녀는 '도라지타령'과 '진도아리랑'을 부르곤 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사람들은 소녀의 소리 한 자락, 노래 한 대목에 감탄하며 박수를 보냈다. 소녀도 단상 위에서 노래를 하는 그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

어린 시절부터 온 마을을 노래로 주름잡았던 김분심(49) 씨. 어른이 된 그는 지금 '김해'라는 단상에 올라서서 민요를 부르는 소리꾼이다.
 
노래 곧잘 불렀던 창선 바닷가 소녀
결혼하고 아이들이 자란 후에야
가슴을 울리는 가야금 소리에 눈을 떠


김분심이 살고 있는 삼계동의 한 아파트를 찾아갔다. 거실 한쪽에 가야금과 장구가 놓여 있다. 집으로 찾아와 민요와 장구를 배우는 문하생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고, 자신의 연습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베란다를 보니 꽃, 나무가 화분마다 싱싱하다. 자그마한 정원 같다.
 
"꽃과 나무를 좋아합니다. 버려진 화분이나 나무를 가져와 정성껏 키우곤 하는데, 싱싱하게 되살아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게 좋아요. 원래의 모양대로 잘 자라 꽃을 피우는 나무를 보면 행복해집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물을 주면서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도 꽃을 보면서 하루의 피로를 풀지요." 베란다에 즐비한 꽃나무들, 그의 에너지원이다.
 
김분심은 경남 남해군 창선면의 한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났다. "밥상에 바다에서 금방 잡아온 해산물이 늘 올라왔지요." 그는 고향 남해의 풍성한 먹을거리 자랑부터 늘어놓았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노래하는 걸 좋아했고, 또 잘 불렀다. 진동초등학교 시절에는 교장선생님이 그를 조례단상 위에 세워 놓고 전교생 앞에서 노래를 부르게 했다. 운동회 때는 일약 스타가 됐고, 소풍을 가서는 장기자랑에서 독무대를 펼치곤 했다. 교실에서는 책상 위에 올라가 노래를 불렀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언니와 언니 친구들은 심심하면 장독대를 둘러싼 낮은 담벼락 즉, 장고방 위에 어린 분심을 올려다 놓고 '노래 하나 불러보라'고 주문하곤 했다. 어느 곳이든 그가 올라서는 자리는 즉석 무대가 됐고, 그는 노래 하나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안겨줬다.
 
남해 창선중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직장생활을 했다. 회사 전체 야유회에서 그가 노래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돌아가면서 노래를 한 자락씩 펼쳐 보이는 시간에, 얼떨결에 앞에 나가, 생각나는 노래 하나를 불렀을 뿐인데, 그의 실력에 놀란 동료들이 아주 난리가 난 것이었다. 이후 회사에서는 '김분심'이라는 이름은 몰라도, '노래 잘 하는 애'에 대해서는 알았다.
 
그토록 노래를 잘 했고, 좋아했지만 처녀 때까지는 정식으로 노래를 배운 적이 없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랐을 무렵, 당시 삼방동에 살았는데, 그는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내가 좋아하는 일이 뭘까'라는 고민에 빠졌다.
 
33세 때 최명숙 한국무용가에 발탁
김경민 서울·경기 민요 이수자에 사사
1996년부터 선소리산타령 강사 활동
문화의집·평생교육원 등에서
민요·장구 가르치며 공연봉사 주력
중부지역 민요 '창부타령' 가장 좋아해

"가야금이 배우고 싶었어요. 가야금 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내 가슴을 울리더군요." 그는 33세 때 한국무용가인 최명숙 선생의 학원을 찾아갔다. 춤, 소리, 기악을 가르치는 국악인들이 강사로 초빙돼 와서 문하생을 길러내는 곳이었다. 김분심이 찾아간 날은 공교롭게도 가야금 강사가 오지 않는 날이었다. 최명숙 선생은 김분심의 목소리를 듣더니 "아는 소리가 있으면 한번 해보라"고 말했다. 김분심은 그 자리에서 '창부타령'을 불렀다. 최명숙 선생은 그의 소리를 듣더니 크게 칭찬을 하면서 "소리를 해보라"고 권했다.
 
▲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가야금을 무릎 위에 올려 놓은 민요 소리꾼 김분심의 자태가 그림을 그린 듯 아름답다. 김병찬 기자 kbc@
김분심은 최명숙 선생을 통해 중요무형문화재 19호 선소리산타령(서울·경기 지역과 서도지방에서 불리는 잡가 중, 서서 소리하는 선소리의 대표 곡목) 이수자인 김경민 선생을 소개받아 소리공부를 시작했다. 몇 년 동안 부산 양정에 살던 김경민 선생이 김해로 오기도 했고, 김분심이 부산에 가서 배우기도 했다. 1996년 그는 선소리산타령 교육 강사가 됐다.
 
"10년을 배운 뒤에 비로소 다른 사람에게 소리를 가르칠 수 있게 됐죠." 그는 안동문화의집에서 소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현재 안동문화의집, 인제대학교 평생교육원, 가야대학교 평생교육원, 김해대학 평생교육원, 김해문화원, 활천제일교회 노인대학 국악학과 등에서 민요와 장구를 가르치고 있다.

이 와중에 공연봉사도 하고 있는데, 노인대학 행사 때마다 그가 이끌고 있는 가야소리예술단이 공연 봉사를 해온 지도 어언 15년이다. 이런 열정과 한결같은 봉사 덕에 노인대학 어르신들은 그를 무척 아낀다. 수업시간에 그가 마른기침이라도 할라치면, 할머니들이 기침에 좋은 차를 달여서 갖다 주기도 한다. 길을 나서면 그를 알아보는 김해의 어르신들이 꽤 많다.
 
그렇다면, 그에게 소리란 무엇일까. "처음 소리 공부를 할 때는 주변에서 '청승맞다, 할매 같다'는 말을 했어요. 그런데 저는 소리가 너무 좋았어요. 고향에서 어릴 적 들었던 우리 소리 우리 가락, 그 가사 한 구절 한 구절이 마음에 와 닿았거든요. 나이가 들수록 그 맛이 더해갑니다. 주변 사람들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우리 소리의 매력을 알아가더군요. 그분들도 우리 소리가 아니고서는 풀어낼 수 없는 삶을 알게 된 거죠. 소리를 하는 것도 듣는 것도 삶의 연륜이 있어야 합니다. 몇 개월 배운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많은 세월이 흘러야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기생'에 대한 견해도 밝혔다. "제 소리를 듣기 좋아하는 한 분과 '기생'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기생은 예능과 시·서·화에 능했던 종합예술인이었는데, 지금은 왜곡돼 전해지고 있습니다. 여자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았던 조선시대에는 양반가문의 여인들도 글자를 모르는 경우가 있었지만, 기생은 글을 알았고 시도 지었죠. 우리 소리 역시 기생에 의해서 예술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소리는 '창부타령'이다. '창부타령'은 서울을 중심으로 한 중부지방에서 가장 많이 불리는 민요 가운데 하나이다. 원래 이 노래는 무당들이 가락과 함께 부르던 무가(巫歌)였는데, 점차 세상에 퍼지면서 경기민요의 대표적인 노래가 됐다. 창부(倡夫)란 무당의 남편으로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을 뜻하기도 하고, 혹은 남자광대나 광대 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광대 신은 생전에 음악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데, 죽어서도 사람들의 일 년 열두 달 횡액을 막아주는 수호신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창부타령'에는 사람들의 희로애락과 만사형통을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가사 역시 다양하다. 우리나라 명창들이 부른 '창부타령'을 보면 가락은 같지만, 똑같은 가사가 거의 없을 정도이다. 부르는 사람이 얼마든지 자기 마음을 담아 부를 수 있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김분심은 "'늘 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언제나 기량을 닦으며 노력하는 자세'라는 글을 거울 앞에 적어두고 마음 속에 새기면서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좋아서, 내가 미쳐서 하는 소리, 이 길이 저의 길입니다"라고 말했는데, 그의 '창부타령'은 오늘도 자신의 마음을 담은 그만의 가사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고, 복을 기원하고 있다.

>> 김분심
중요무형문화재 19호 선소리산타령 교육강사. 경·서도창 기악전문 지도자·강사. 국악교육자격평가원 전문지도자. 김해 민속보존회 민요분과 회원. 현재 김해문화원 강사 외 여러 기관의 강사와 봉사활동 진행 중. 진해 전국 국악경연대회 경기민요 단체부문 최우수상(2003). 마산 도섬국화축제 전국국악경연대회 경기민요부문 대상(2005). 한국예술진흥원 문화예술 대상(2007). 세계평화예술대상(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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