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친분이 있던 인사가 주최한 체육행사 개회식에 참석하였다. 주최 측이 내빈석으로 안내했다. 그런데 정작 내빈소개에서 필자의 이름은 빠졌다. 머쓱했지만 조금 전의 장면이 떠 올랐다. 그날은 지방자치단체장이 참석한 행사였는데, 담당 공무원이 먼저 도착해 주최 측의 진행 시나리오를 사전검열(!)하였다. 그리고 굵은 싸인펜으로 좍좍 줄을 긋기 시작했다. 필시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나 지자체장이 싫어하는 사람들은 지워졌을 것이고, 필자도 그중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오히려 당황한 것은 주최측이었다. 더욱 가관인 것은 그 공무원은 주최 측에 지자체장을 소개할 때 사용할 내용까지 미리 적어 주었다. "이번 해외순방에서 우수한 해외 기업 유치 실적을…"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1970년대 가수를 소개할 때 "방금 동남아 순회공연을 마치고…"가 연상되었다.
 
참 촌스럽다. 이렇듯 공무원이 시시콜콜 간섭할 수 있는 명분은 단 한가지 보조금 때문이다. 예산액의 전부가 아닌 일부를 지원하면서, 그것을 빌미로 행사 전반에 간섭하고, 심지어 지자체장의 일정을 이유로, 행사 시작 시간 조차 당겼다 늦추었다를 다반사로 한다. 그 보조금은 시장이나 공무원의 개인 돈이 아니라 시민의 세금이다. 시민의 돈으로 시민의 체육회에 지원하면서 생색을 내고 나아가 온갖 간섭까지 다하니 한마디로 치사한 '갑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금년도 상반기 자동차세를 깜박 잊고 납부하지 못했다. 독촉장이 왔는데 납부기한을 착각해 일주일 정도 지났다. 근데 일요일 아침에 마당에 있던 차량의 번호판이 없어졌다. 거기에는 세금 체납으로 번호판을 영치하니 의문사항이 있으면 연락하라는 안내장만 놓여 있었다. 몇 차례 전화를 해도 담당공무원과 통화할 수 없었다. 안내장에 적힌 대로 동사무소에 직접 찾아갔으나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다행히 일요일에 차량을 사용할 일이 없어서 다음날 세금을 납부하고 돌려 받았다.
 
그런데 일요일에 차량으로 생업을 꾸려가는 사람이 이런 일을 당했다면 어땠을까. 그 사람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한 채 꼬박 하루를 손해 보게 될 것이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에게 하루를 공친다는 것은 지옥 같은 일이다. 공무원이 실적을 위해 일요일에 번호판을 떼고서는 시민의 불편은 나몰라라 사라져 버리는 행태는 지독한 행정편의주의다.
 
최근 안행부가 자동차세를 3번 체납한 경우에 번호판을 영치한다는 방침을 들은 바 있어서 관련규정을 찾아 보았다. 거기에는 번호판을 영치할 때는 차주와 연락이 되지 않는 경우에만 안내장 부착으로 갈음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 공무원은 차주가 있었음에도 집안 마당까지 들어와 번호판을 떼고서는 당일에는 연락도 되지 않는 안내장 한 장 달랑 두고 사라져버렸으니 참으로 불량한 갑질이다. 법적으로 따지면 주인 허락 없이 마당에 들어왔으므로 주거침입죄가 될 수도 있다고 한다. 이쯤 되면 개념상실 갑이다.
 
물론 반대도 있다. 쓰레기를 임시로 모으는 장소가 주택가 근처에 있어서, 지나가던 사람들이 온갖 쓰레기를 버려 너무 더러웠다. 한 주민이 토요일이지만 참다 못해 담당 공무원의 연락처를 파악하여 쓰레기 임시 집하장을 옮기든지, 아니면 쓰레기라도 좀 치워달라고 했다. 조금 있으니까 담당 공무원이 쓰레기를 치우고 있었다. 토요일은 쉬는 날인데 월요일에 하면 되지 않느냐고 물으니까, 민원이 들어왔는데 토요일, 일요일이 어디 있냐고 하더란다. 착한 갑이요, 친절한 갑질이다.
 
사람이 살 만한 세상이 된다는 것은 갑이 을처럼 행동하고 을이 갑처럼 당당해지는 사회일 것이다. 반대로 갑이 치사한 갑질을 반복하고 을이 숨조차 쉴 수 없는 사회라면 인구가 늘어나고 외형상 규모가 아무리 커져봐야 여전히 후진적 도시에 불과하다. 인구의 절반인 여성, 외국인 근로자는 물론 서민을 비롯한 소외계층의 대부분은 을이다. 이들이 당당하게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제대로 된 사회이다. 물극필반(物極必反)이란 말이 있다. 극에 달하면 반드시 반전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을이 극한에 몰리면 반전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그래서 갑이 을을 배려하는 것은 동시에 갑이 사는 길이기도 하다. '차카게 살자'는 조폭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불량한 갑들이여! 부디 착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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