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꽃은 김해에서든 뉴욕에서든, 산에서든 강가에서든 어디에서든 다 좋더라, 고 말하는 걸 들은 뒤로는, 꽃을 유심히 즐거운 마음으로 감상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그러던 차, 부산 태종대 태종사에 수국이 만개했다기에, 수국 보러 태종사엘 갔습니다. (태종사는 매년 수국축제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지난 7일부터 14일까지가 축제기간이었는데, 수국은 계속 피어 있으니 지금도 태종사에 가면 수국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꽃 중에서도 수국을 특히 좋아합니다. 꽃들의 색깔로는 보라색과 연두색을 좋아하는데, 수국들은 종류를 불문하고 이 두 색깔이 대종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마음이 가는 걸까요?
 
태종사에 갔더니, 200여 종 3천여 점의 수국들이 경내에 가득했습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해맑은 표정으로 사진을 찍고, 감상을 나누며 즐거워했습니다. 1천 원짜리 지짐을 굽고 있던 중년의 한 자원봉사자는 "극락이 있다면 이런 곳이 극락일 것"이라며 짜장 해맑은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때, 전남 승주 선암사의 수국 생각이 났습니다. 선암사는 그 자체가 꽃 대궐이라서, 철따라 매화·동백·철쭉·산수유·영산홍·수국·물푸레나무 같은 화목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피고 지고를 반복하고, 고목 매화 등걸이 특히 유명하다지만, 저에게는 수국이 우선입니다. 기실, 태종사 수국이 볼만 하다지만, 지나치게 풍성해서 '절제의 미'를 느끼기란 쉽지 않습니다. '절제의 미'의 관점에서 보면, 수국 피는 공간들 가운데 선암사를 따를 곳은 없어 보입니다.
 
선암사는 수종이 100종을 넘고, 600년 이상 된 무우전의 선암매, 무량수각 앞의 누운 소나무, 지장전 위의 영산홍과 자산홍, 칠전차밭의 700년 넘은 차나무 따위들이 다 '선암사의 부처님'이라고들 하지만, 일주문 앞에 단아하게 자리 잡은 몇 안 되는 수국들이 제게는 유일한 부처님입니다.
 
아, 참. 선암사 수국을 보려면 1㎞ 정도 고즈넉한 흙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키 큰 나무들이 넉넉한 잎으로 햇볕을 잘 가려주고, 옆으로 옥색 밤색의 계곡물이 흘러내려서 편안하고 상쾌하게 진행할 수 있으니, 걷는 걸 두려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가다보면 길 양 옆으로 몸 전체가 붉고, 낯이 험상궂은 목장승 한 쌍이 나타납니다. 1987년에 세운 것이지만, 기원은 조선조 말엽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오른편 장승에는 '호법선신(護法善神)'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뭇 중생들의 성불을 돕는 착한 신을 뜻합니다. 왼편 장승에는 '방생정계(放生淨界)'라는 글자가 적혀 있습니다. 산 것들을 더욱 아끼고 사랑하는 한편, 매여 있는 모든 것들에게 자유를 준다는 뜻입니다. 곧 방학과 휴가철입니다. 두 장승한테서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전수받고, 타박타박 걸어서 마침내 일주문 너머 보라색 수국들을 만나 환희를 경험하시길 기원합니다.
 
더불어, 이 무더위에 봉림산업단지 조성 문제로 근심하는 분들과 신세계 백화점 입점 문제로 신음하는 전통시장 상인들에게, 만개한 수국 같은 평화가 깃들기를.
 
그런데, 광포한 행정과 몰염치한 자본이 거짓말과 패악을 일삼고, 숱한 사람들이 곤욕을 치르고 있는 이 마당에, 명색 기자란 사람이 과연 수국 운운하면서 극락, 절제의 미, 해맑은 표정, 성불, 환희, 평화… 이런 이야기나 하고 있어도 괜찮은 것일까요? 하기야, 수국 앞에 서면 이 무도한 자들도 순화가 될지 모를 일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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