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이거 사 줘!" 예쁜 머리핀이나 헤어밴드를 본 딸은 엄마를 돌아보며 말한다. 그럴 때마다 "집에 가서 만들어줄게"라고 대답하는 엄마가 있다. 리본공예가 이난이(35) 씨다. 리본으로 생활소품과 패션소품을 만들어내는 그의 공방이자, 동료들과 함께 실생활에 쓰이는 생활 공예를 가르치는 풀잎문화센터 삼계지부를 찾아가보았다.

▲ 풀잎문화센터 삼계지부의 벽은 이난이 씨와 동료 공예가들, 수강생들이 만든 작품들로 가득하다.

자투리 천 하나도 나름의 쓸모가 있어
실생활에 바로 쓰인다는 것도 좋고
색·재질·너비 따라 작품 다양하게 나와
하면 할수록 리본공예 매력 더 느껴
도자기·목공예까지 수용할 공간이 목표

이난이(李蘭伊). 거꾸로 읽어도 이난이다. 쉽고도 예쁜 이름이다. '난초같이 곱게 자라라'는 뜻을 담아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다.
 
그는 김해 장유에서 나고 자랐다. 친가, 외가 모두 김해에서 대대로 살아온 김해 토박이다. 장유초등학교, 장유중학교, 김해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전파상을 운영한 아버지는 손재주가 좋았고, 어머니도 손으로 뭔가 만드는 것을 좋아하셨어요. 어머니가 뜨개질로 떠 준 옷을 입고 다녔죠. 늘 무언가를 만들고 계신 두 분을 보면서 자랐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부모님의 손재주가 고스란히 제게로 왔나봅니다."
 
그러나 이 씨는 학창시절 미술시간에 칭찬을 받은 기억은 없다고 고백했다. "미술시간 때면 열과 성을 다해, 나름대로 정성을 다해 작품을 만들었는데, 미술선생님들은 '성의가 없다'고 나무랐어요. 이상하죠? 정말 열심히 만들었는데…." 옛 추억을 더듬으면서 그는 웃었다. 코드가 맞지 않았나? 어쩌면 예술가적 기질끼리 서로 부딪혔던 것은 아닐까?
 
그는 부산외대를 다니던 중 휴학을 했다. 액세서리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 가게 사장님과 결혼했다. 아이들이 어느새 훌쩍 자라 아들이 초등학교 5학년, 딸이 4학년이다. "일찍 결혼해 두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우울증도 잠깐 앓았습니다. 액세서리 가게를 접고 회사생활을 하던 남편은 일 때문에 늘 늦게 들어왔고, 혼자서 두 아이를 감당하는 게 힘들었죠. 친정엄마가 옆에서 항상 도와줬어요. 그렇게 매일매일 비슷한 일상이 반복되다 보니 나도 뭔가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는 9년 전 내외문화의집에서 비즈공예, 리본공예를 배웠다. 아들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했고, 딸은 막 돌을 지났을 때였다. "내외문화의집에서 장윤선 선생님께 공예를 배웠는데 저한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공예를 배우는 것도 재미있었고, 열심히 하면 희망이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게다가 선생님께 공예뿐만 아니라 제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도 배웠으니까요. 선생님은 제게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꿈과 계획을 가지라'며 용기도 주셨고, '너의 계획과 희망을 구체적으로 적어라'라고 하시면서 계획을 현실로 옮기는 방법도 일러주셨습니다.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삶의 자세, 태도, 생각….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제겐 마치 롤 모델 같은 분입니다."
 
그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꿈과 계획,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을 모두 적어둔다. "공방 이름은 이렇게 할 것이다, 언젠가는 빨간 차를 가지고 싶다, 어떤 작품을 만들고 싶다, 심지어 하루 종일 잠자고 싶다는 것 까지…. 사소한 일까지도 모두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하나하나 이루어질 때마다 줄을 그었죠. 그럴 때 기분 좋잖아요. 줄을 쳐가는 재미! 시간이 지나 그 계획이 적힌 노트를 펼쳐보면 하나하나 이루어져 있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내가 이렇게 해내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지금도 제 꿈을 적고 있습니다. 남들이 볼 때 터무니없다, 말도 안 된다고 하더라도 그건 제 꿈이니까요. 혹시 또 모르죠. 그 말도 안 되던 꿈이 이루어질지 누가 알겠어요."
 
그는 정윤선 씨의 보조 자격으로, 가락문화제의 축제장 공예체험 부스에 처음 섰다. "제겐 좋은 기회였어요. 몇 년이 지나 단독으로 부스도 받게 되고, 수업 의뢰도 계속 들어오고, 공예가로 조금씩 인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공예를 배우러 다니기 시작했을 때 남편은 반대했다고 한다. "남편이 '감각도 없는 당신이 공예를 배운다고? 아닌 것 같아! 다시 생각해 봐'라고 하더군요. 회사생활 하기 전에 옷가게, 액세서리 가게를 경영했던 남편이 볼 때 제겐 감각이 없어 보였나 봐요. 처음부터 계속 '태클'을 걸더라구요! 공예 배운다며 밖에 나가는 게 싫었던 건지, 제가 정말 감각이 없어 보였던 건지는 알 수 없지만요. 처음 만든 비즈공예품을 보여줬더니 '쓸데없는 걸 만들었다'며 핀잔을 주더라구요. 그때 마음속으로 '두고 보라'고 다짐했어요. 이를 갈았던 것 같아요." 그는 당시의 일을 흥미진진하게 들려주었다. "1년쯤 지나고, 가락문화제에도 나가고, 강사활동도 하고, 행사에 불려다니기 시작하자 그때부터는 완전히 달라지더라구요. 축제 부스에 회사 사람들과 함께 오기도 하고, 천막을 치러 갈까? 걷으러 갈까? 짐을 들어줄까? 운전해줄까? 하면서 많이 도와주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아내가 끝까지 꿈을 이루어내도록 남편이 자극을 준 것 같기도 하다.
 
그는 리본공예의 매력으로 '다양성'을 꼽았다. "똑같은 기법으로 만들어도, 리본의 색, 재질, 너비에 따라 각각 다른 느낌의 작품이 나오거든요. 그게 너무 재미있어요. 실생활에 바로 쓰인다는 점도 좋구요. 만드는 과정에서 바로 다른 기법으로 바꿀 수도 있어요. 실수하는 순간, 새로운 기법을 발견하기도 하죠."
 
그의 작업대 주변에는 각양각색의 리본을 비롯해, 자투리 천, 크고 작은 장식 등이 담겨진 상자들이 많다. "남들이 볼 때는 다 쓰고 남은 자투리 천에 불과하고, 묶을 수도 없는 짧은 줄로 보이겠지만, 리본공예를 하는 제 눈으로 보면 언제, 어떤 작품에, 어떻게 쓰일지 모르니까 그걸 전부 모아두고 있어요. 구석구석이 상자이고 짐이라 사람들은 잡동사니가 왜 이렇게 많으냐고 말하지만, 그게 다 쓰일 데 있는 소중한 물건들이랍니다."
 
▲ 꼭 이루고 싶은 꿈과 계획을 꼼꼼하게 기록해두고 실천에 옮기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는 리본공예가 이난이 씨. 박나래 skfoqkr@
그는 길을 걸을 때 자신도 모르게 지나가는 여자애들의 머리만 본다고 했다. "머리핀, 헤어밴드, 고무줄…. 예사로 안보이죠. 딸아이가 사달라고 하면 '집에 가서 만들어줄게'라고 대답하기 일쑤이구요. 제가 사는 물건은 딸아이가 사달라는 물건이 아니라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르는 것들뿐입니다. 그걸 사서 집에 돌아와 해체를 해보는 겁니다. 해체하면 방법을 알게 되죠, 그럼 또 기법이 하나 더 늘어나구요.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도 액세서리만 봅니다. 매일 보는 드라마가 있어도 스토리를 안보니까 사실 줄거리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잘 몰라요."
 
그는 개인공방을 운영하다 2012년 12월 말부터 삼계동 1487-5 건물 703호에 풀잎문화센터 삼계지부를 열고 있다. 그가 리본공예를 가르치고, 동료 공예가들이 와서 가죽공예, 한지공예, 포크아트 등을 가르치고 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각 분야별로 나누어 수업을 진행한다. "한 자리에서 여러 분야의 공예를 접할 수 있 고, 또 실생활에서 바로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을 만들고 있기 때문인지 사람들이 꾸준히 찾아오고 있습니다. 같은 분야의 길을 걷고 있는 선후배 공예가들도 이곳에서 만날 수 있어 좋아요. 언젠가는 도자기와 목공예까지 이곳에서 모두 할 수 있도록 공간을 더 확대하는 게 제 꿈이랍니다."
 
하고 싶은 일, 이루고 싶은 목표를 적어둔다는 '이난이의 꿈 목록'에 벌써 풀잎문화센터의 운영에 대한 희망사항이 적혀 있나 보다. 오늘도 그의 노트에 적힌 꿈들이 그를 또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 이난이
리본공예가. 풀잎문화센터 삼계지부 원장. 김해공예협회 회원. 평생교육원 강사
문화의집 강사, 초·중학교 강사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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