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전의 허웅 선생 모습.
최현배 선생 재직 연희전문학교 진학
외솔의 <우리말본> 읽으며 항일의지
한글강습소 열어 우리말글 보급 주력


평생을 '한글사랑 나라사랑'으로 일관한 허웅(1918~2004) 선생은 김해 사람이다.
 
허웅 선생은 1918년 7월 26일 동상동 965번지에서 부친 허수와 모친 윤영순의 5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김해보통학교(현 김해동광초등학교)와 부산 동래 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동래고보 재학 시절, 교사들은 제자의 재능을 아껴 동경제국대학 진학 수순으로 동경제일고등학교 입학을 추진하려 했다. 허웅 선생은 그러나 이를 마다하고, 1935년 18세 때 외솔 최현배 선생이 재직하던 연희전문학교 진학을 선택했다. 한글을 배우고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일제의 핍박이 날로 심해지던 시절이었지만, 선생은 외솔의 <우리 말본>을 읽고 학우들과 비밀독서모임을 이끌면서 항일 의지를 길렀다.
 
연희전문에 입학한 다음 해에 외솔은 일제의 압력으로 교수직에서 파직됐고,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이후 선생은 혼자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1940년 중퇴를 했다. 이때부터 선생은 독학으로 15세기 국어를 연구하는 한편 세계의 저명한 언어학 이론을 공부했다. 일제강점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한글 연구에 매진한 것은 또 다른 형태의 독립운동이었다.
 
선생은 8·15 광복과 동시에 고향 김해에서 한글강습소를 열어 우리말과 우리글을 보급하기 시작했다.
 
선생은 1947년 9월, 30세 때 부산대학교 교수로 임용됐다. 이후 성균관대학교 연세대학교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선생의 제자들은 현재 전국의 강단과 교단에서 국어를 연구하거나 가르치고 있다. 선생의 차남이자 막내아들인 허원욱도 문법론을 전공한 국어학자로서, 건국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선생은 한글을 언어과학적으로 분석·연구, 세계의 그 어떤 문자보다 한글이 우수함을 알렸다. 선생의 업적은 국내에서보다 세계의 언어학자들로부터 더 높이 인정받고 있다. 자주·자립적 국어학의 초석을 놓은 주시경, 국어문법의 체계를 세우고 애국적 계몽주의 국어학을 확립한 최현배에 이어, 허웅 선생은 국어학을 언어과학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학자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선생은 생전에 "한 나라의 말은 그 나라의 정신이며, 그 겨레의 문화 창조의 원동력이다", "한글은 우리 겨레와 민중을 위한 글자로 태어난 것이다", "우리 말글과 문화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는 것에서 나아가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을 남겼다.
 
선생은 서울에 살면서도 김해를 자주 찾았고, 늘 고향인 김해를 자랑했다.
 
선생은 2004년 1월 26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6세였다. 한글학자로서 큰 업적을 남겼고, 고향을 사랑했던 선생이지만, 선생을 낳은 김해에는 아직까지 선생을 기리는 작은 기념물 하나 없다.
 
한편, 선생은 국내 최초로 음운학의 공시적·통시적 체계를 세운 <국어음운론>(1958), 최초의 언어학 개론서인 <언어학개론>(1963), 15세기 국어문법을 서술한 <우리옛말본>(1975), <국어학-우리말의 오늘, 어제>(1983), <20세기 우리말의 통어론>(1999) 등 국어학계의 보물 같은 저서들을 많이 남겼다. 생전에 외솔상(1973), 국민훈장 모란장(1973), 성곡학술문화상(1986), 세종문화상(1990), 주시경학술상(1993), 세종성왕 대상(1998) 등을 받았고, 2004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됐다. (본보 2011년 11월 30일, 12월 7일자 '김해의 인물열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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