옻나무 표피에 상처를 내면 진(유회백색유액상 수지)이 배어 나온다.
이 옻진을 가공해 그릇이나 가구 등에 바르는 것을 옻칠이라 한다.
옻칠은 페인트나 에나멜에 비해 깊은 색감을 나타낸다.
우리나라에서 옻칠한 기물의 흔적을 볼 수 있는 최초의 시기는 B.C 3세기께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시대 고분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칠기가 출토됐다.
신라에서는 칠전(漆典)이라는 관서가 따로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중상서와 군기감에, 조선시대에는 경공장과 외공장에 칠장(옻칠 장인)이 배속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옻칠도 우리 전통공예기술과 함께 명맥이 끊겨버릴 위기를 맞았으나, 다행히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다. 김해에도 옻칠공예가가 있다. 화목3통의 작은 시골집에서 칠장의 길을 걷기 시작한 박부영(49) 씨다. 

 유럽식 포크아트에 매료된 것 계기
 김해로 오면서 옻칠 공예로 관심 넓혀
 올해 김해공예품대전서 금상 수상

"포크아트는 강렬한 느낌이지만
 옻칠은 언제나 기품 있고 매력적인 느낌"
 전통색 바탕으로 한 그림 접목 혼신


▲ 화목3통 작업실에서 만난 박부영. 옻칠 작품 위에 다양한 그림을 접목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화목3통 남포교회 옆, 나무 많은 집으로 오세요." 박부영의 말대로, 그의 작업실이자 살림공간은 '나무 많은 집'이었다. 그리고 집 주변에는 온통 논, 김해평야가 펼쳐져 있었다.
 
집안으로 들어서니,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포크아트공예를 했던 그의 작품들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서양화, 민화, 서예 등 그의 그림도 구경할 수 있었다. 천장 밑 선반, 책상 아래, 가구 틈 사이. 눈 가는 곳마다 그의 작품들이 빼곡했다. 보물창고가 따로 없었다.
 
기자가 찾아갔을 때, 박부영은 일본의 전통공예·예술문화의 도시인 이시카와 현 가나자와시를 둘러보고 온 다음날이라고 했다. 아직 여행 가방을 풀지도 못한 그와 인터뷰를 시작했다.
 
그는 경남 마산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만화책에 푹 빠져 살았다. 방 뒤의 좁은 공간인 마루방에 만화책을 숨겨두고 남동생과 같이 만화책을 봤다. "어머니께 혼도 많이 났죠. 그래도 그 세계가 너무 재미있었어요."
 
어린 시절에 본 만화책 이야기를 하는 그의 옆에서 어머니 김보화(74) 씨가 한마디 보탰다. "만화책 속의 그림을 보고 똑같이 그리더군요. 얼마나 예쁘게 그렸던지, 다들 놀랐죠. 글씨도 잘 썼구요. 재주가 많은 딸이에요. 친정아버지가 서예를 잘 하셨는데, 아무래도 그 피를 이어받은 듯 하다고, 친척들은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은 그의 책상 주변에 몰려와 <캔디>며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주인공을 그려달라고 졸라댔다. 그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 친구들은 줄을 서서 기다렸다. 그의 그림을 받으면 코팅을 해 소중하게 보관했다. <캔디>의 테리우스,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오스칼과 앙드레의 모습이 특히 인기가 많았다.
 
동생 박용성(47) 씨도 누나의 그림솜씨를 기억하고 있었다. 동생은 마침 벌초를 위해 김해에 내려온 참이었다. "제가 모 신문사의 어린이신문에 공모한 그림그리기 대회에서 가작을 수상했어요. 크레용 선물을 부상으로 받았는데, 그 그림이 사실은 누나가 절반 이상을 그린 것이었어요." 동생이 옛 일을 폭로(!)하자, 다시 한 번 웃음꽃이 피었다. "그렇게 그림을 좋아했는데, 미술학원엘 못 보냈어요. 제대로 뒷바라지를 해줬더라면…" 어머니는 홀로 3남매를 키운 탓에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다며, 안타까운 심경을 드러냈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던 박부영은 홍익대 미대 진학을 꿈꾸었다, 그러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부산여대 상업디자인과를 졸업했고, 곧바로 부산백화점 판촉실에 입사했다. 백화점 판촉실은 홍보가이드북, 매장 디스플레이, POP제작 등을 맡고 있는 부서이다. 부산백화점에서 5년 여 근무하다 파크랜드 본사 판촉실로 옮겼다. 여기서도 판촉실 본래의 근무에다 신문광고와 간판디자인까지 모두 맡아서 일했다.
 
▲ 2013 김해공예품대전에서 금상을 받은 옻칠공예 작품 '빛을 담아'. 박부영은 김해평야의 해질녘 아름다운 하늘빛을 작품에 담고 싶어 한다. 박나래 skfoqkr@

결혼을 하면서 회사를 그만두었지만, 결혼 전까지 현장을 종횡무진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았던 그였으니, 결혼했다고 해서 집에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이것저것 배우러 다니던 중에 태화쇼핑 전시관에서 처음으로 '포크아트'를 보았어요. 보는 순간, '평생 이 작업을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때부터 어린 딸 둘을 데리고 다니면서 배웠죠."
 
포크아트는 16~17세기께 유럽의 귀족이나 상류계급 사이에서 유행했던 생활 공예이다. 가구 또는 주방용품을 장식하기 위해 그림을 그려넣은 데서 시작됐다. 이 풍습을 따라 농민 계층의 사람들이 농사일이 한가한 겨울의 여가시간을 이용해 옛 가구나 낡은 집기 등에 고풍스러운 그림을 그려넣으면서 점차 널리 유포되었다. 포크아트는 유럽 시골의 서민계층으로 널리 퍼지면서 보통사람들의 예술, 서민예술, 민속예술로 자리 잡았다.
 
"포크아트 관련 책도 사고, 외국 인터넷 사이트도 방문하면서 다양한 기법을 익혔어요. 그렇게 포크아트를 열심히 했는데, 김해로 오면서부터는 우리 전통공예에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그가 김해로 온 것은 15년 전이다. 전원주택을 짓는 꿈을 가지고 있던 남편이 어느 가을날, 그를 화목3통의 현재 집으로 데리고 왔다. 낡은 시골집 위로 주변의 나무에서 떨어진 낙엽이 수북했다. 그는 시골집이 첫눈에 마음에 들었다. 부부는 이 집을 리모델링했다. 아니, 아직도 완성되지 않았으니 리모델링 중이라 해야겠다. 집은 본채와 아래채로 구성돼 있는데, 본채는 60㎝를 들어 올리고 바닥을 다시 다졌다. "부산도시개발공사를 다니는 남편은 퇴근하고 돌아오면 집 짓는 일을 했고, 당시 임신 중이었던 나도 함께 일했어요. 남편은 집짓는 일에 관심이 많아요. 관련서적만 해도 수십 권이에요. 지금도 꾸준히, 계속해서, 이 집을 손보고 수리하고 보강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직 완성이 되지 않았어요."
 
김해평야 속 화목3통에 살면서, 김해의 공예인들을 만나면서, 그의 작품세계는 한 발 더 나아갔다. "김해에 와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서양 분위기인 포크아트에서 동양의 전통으로 관심이 기울었어요. 나 자신의 내면세계도 좀 더 들여다보게 됐구요. 그래서 민화며, 전통공예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만화책을 보며 혼자 주인공 얼굴을 그렸던 유년시절, 화가를 꿈꾸며 그림을 그렸던 소녀시절, 홍보디자인 업무를 전문으로 맡았던 직장시절 그리고 그 시절을 지나 포크아트와 전통공예를 두루 경험한 그는 마침내 옻칠공예와 만났다.
 
"옻칠을 보았을 때, 포크아트를 처음 접했을 때보다 더 강력한 느낌으로 '평생 이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옻칠작품을 보는 순간 '기품 있다, 매력적이다'라는 느낌이 가슴 가득 들어왔죠. 옻칠이라면, 나만의 세계를 담아내는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는 2013년 김해공예품대전에서 금상을 받은 작품 '빛을 담아'를 펼쳐보였다. 옻칠 식기이다. 전통옻칠 작업은 과정이 복잡할뿐더러 힘이 든다. 사포질, 생칠바르기, 베바르기, 자개붙임, 아교빼기, 초광내기, 재광내기, 삼광내기 등 거의 중노동에 가까운 작업이다.
 
박부영은 자신이 그토록 그리고 싶었던 그림을 옻칠작품 위에 올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공예에 그림을 접목하고 싶어요. 제가 천연염색을 배울 때 쪽빛의 매력에 빠졌는데, 그 느낌을 살려낸 색을 표현해보고 싶어요. 검은 빛이 도는 푸른색, 우주적 느낌이 드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색…."
 
그는 도대체 어디서 이런 색을 보았던 것일까. "김해평야에서 해지는 장면 보셨어요? 해질 무렵 집 밖에 나와 서면, 제 머리 위 하늘 전체가 놀이었다가 서서히 해가 저물지요. 푸른빛이었다가, 잿빛이었다가, 점점 어두워지죠. 그것을 표현하고 싶어요. 김해평야의 하늘!"

>> 박부영
김해공예협회 회원, 김해미술협회 회원, 경남공예조합회원. 김해여성미술 수상자가 초대 3인전, 김해미술인대동전, 한불국제교류전 외 전시회 다수. 2013 김해공예품대전 금상, 김해미술대전 특선, 여성미술대상전 특별상 외 수상경력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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