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바다 속에 사는 전복과 조개껍데기를 가공한 다음, 옻칠한 나무에 그림으로 올리고, 다시 칠을 하고
표면을 연마해서 만드는 나전칠기(螺鈿漆器). '나전'은 한국·중국·일본에서 공통적으로 쓰이는 한자어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자개'라 불렀다. 나전칠기 작품을 만드는 일은 '자개 박는다'고 했다. 나전칠기 공정은 재료를 구하는 것에서부터 작품을 만들기까지 시일도 오래 걸리고, 힘도 많이 든다. 추석 직전, 김해에서 나전칠기와 옻칠공예 작업을 하는 오세윤(61) 씨의 작업실을 찾았다. 그는 나전칠기에 회화기법을 접목시킴으로써, 나전칠기를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켰다는 평을 듣고 있다.

▲ "전통적인 기법만 고집해서는 나전칠기가 살아남기 힘듭니다. 현대적인 감각이 접목되어야 합니다." 나전칠기·옻칠 공예가 오세윤 씨가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병찬 기자 kbc@
 십장생이 주인공이었던 자개장롱
 전통기법에 현대적 감각 접목시켜
 자신만의 그림 문양으로 작품 창작

 1989년 '을숙도 일출'로 전국적 명성
 서울 전시회 때 '금강산 만추' 대상 영예
"자개 박는 일 힘들지만 놓을 수가 없어"


"더이상 설명이 필요 없어요. 이 분야에서는 국내 최고입니다. 오세윤 선생이 만든 자개장롱은 전국으로 팔려나갑니다. 작품을 직접 보시면 깜짝 놀라실 거예요."
 
'공간&' 취재 중에 '장유도예'의 김희원·박희숙 부부(본보 9월 10일자 보도)가  오세윤 씨를 적극적으로 소개했다.
 
장유동 율하 4로 40번 길 102 오세윤의 작업실에 들어섰을 때, 그들의 말대로 기자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어린 시절 안방에 놓여 있던 자개장롱을 기억하고 있긴 했지만, 오세윤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작품은 그 차원이 달랐다.
 

▲ 자개장롱의 문짝마다 다른 그림을 자개로 박는다. 오세윤 씨는 그 문양그림을 100여 장 이상 직접 그려 보관하고 있다.
오세윤은 경남 고성군 영현면 연하리에서 태어났다. 나전칠기의 고장이라 불리는 통영, 거기에서 살던 외사촌 형이 서울에서 자개공장을 하고 있었던 게, 그가 나전칠기의 길로 들어선 계기가 됐다. 그는 처음 자개장롱을 접했을 때, 단박에 도취됐다고 한다. "까만 바탕 위에서 자개로 표현된 소나무가 빛나고 있었어요. 그 화려함에 마음을 빼앗겼죠. 그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오세윤은 스물한 살 즈음부터 외사촌 형 밑에서 나전칠기의 다양한 기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형님의 자개공장이 제법 컸어요. 형님 밑에서 자개를 배우는 사람들이 열 두세 명 됐습니다. 제가 몸이 좀 약했는데 형님이 따로 약도 지어주시고,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려고 애를 많이 쓰셨지요. 힘이 들어 그만 두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생활의 방편이었으니 계속 붙잡고 있었습니다. 좋아하는 일이기도 했구요. 이젠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의 원래 꿈은 화가였다. 나전 기법을 익히는 동안에도 문인화 공부를 계속했다. 그가 자개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은 그 덕분이다. "예전에 자개장롱을 만든 우리 선조들은 주로 십장생을 주제로 했습니다. 저는 저의 그림을 그렸던 거지요.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자개로 그림을 그리는 겁니다. 전통기법만을 고집해서는 나전칠기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세월이 변하면서 사람들의 시각도 바뀌었거든요. 전통기법에다 현대적인 감각을 접목시켜야 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자개장롱에 자신만의 그림을 그린다. 그가 직접 그린 자개장롱 문양 도안만 해도 100여 장이 넘는다. 그 그림은 마치 식물과 동물의 세밀화를 보는 듯하다. 그 그림들을 따로 책으로 출간해야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가 부산 사하구 장림동에 작업실을 두고 있던 시절의 일화 하나. 1989년에 열린 '제1회 나전칠기 창작회원전'은 그의 작품을 전국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이 전시회에 그는 '을숙도 일출'이라는 작품을 출품했다. 십장생을 올린 자개장롱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은 그의 작품 앞에서 열광했다. 1989년 3월 15일자 국제신문은 이 전시회를 소개하면서 그의 작품 사진을 실었는데, 그 사진 덕분에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서울에서 자개장롱 전시회가 열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 전시회에 '금강산 만추'라는 작품을 출품했다. 금강산의 가을을 자개로 표현한 것이었다. 전국의 가구상들이 몰려들어 관람하는 이 전시회에서 그는 대상을 받았다.
 
▲ 습지와 갈대밭을 담은 나전칠기 작품. 솜털처럼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자개로 꼼꼼하게 표현했다.
'을숙도 일출'도 '금강산 만추'도 전시가 끝나자마자 팔렸다. 그리고 전국의 가구상들이 그를 찾아와 작품을 만들어 달라고 성화를 부렸다. 그의 작품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일도 많아졌다. "너무 바빠서, 자개 박다가 죽겠구나 싶었어요. 그때는 몇 시간 자지도 못하고 밤샘하는 게 다반사였어요. 밤을 꼬박 새운 채 일하고 있으면, 아침에 출근한 직원들은 그것도 모르고 '일찍 출근하셨네요' 라고 말했죠. 그렇게 7년 정도는 그야말로 전쟁 치르듯 자개를 박았습니다."
 
큰 자개장롱 작품이거나, 작은 찻상이거나 작품을 완성하는 게 힘들기는 매한가지다. 먼저 백골(기물의 형태만 짜놓은 것)을 삼베로 싸고, 그 위에 옻칠을 한다. 옻칠을 할 때는 먼지가 들어가면 안 되기 때문에 문을 닫고 한다. 옷에서 먼지가 떨어질 수도 있어서 속옷 하나만 걸치고 한다. 옻칠이 마르면 자개를 박는다.
 
오세윤이 자개를 보여주었다. "우리나라의 전복껍데기를 가공한 걸 '색패'라고 합니다. 자개 중의 으뜸이죠. 가장 화려합니다. 동남아의 조개껍데기도 많이 씁니다. 그런데, 지금은 동남아 국가들이 자연보호 차원에서 조개를 잡지도 않고, 수출도 안합니다. 지금은 자개 재료를 구하기조차 힘듭니다. 돈을 주고 황금은 살 수 있어도, 조개껍데기는 못 구하는 거지요. 저는 예전에 사두었던 재료를 사용합니다."
 
우리나라의 전복껍데기로 만든 색패는 청록 빛깔을 띤 복잡한 색상이다. 빛을 받는 각도에 따라 색이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에 더 화려하고 아름답다. 동남아의 조개나 소라를 가공해 만드는 야광패는 흰색을 띤다. 색패와 야광패가 아름다운 빛깔을 발하는 것은 탄산칼슘의 무색투명한 결정이 주성분이라서, 빛을 받을 때 프리즘 같은 색광현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서울, 부산, 통영 등지에 전복과 조개껍데기를 가공하는 공장이 엄청나게 많았는데, 지금은 4곳 정도밖에 안 남았습니다. 저도 예전에 구해둔 이 재료가 떨어지면 작업을 계속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어요."
 
둥글게 말려 올라가는 조개껍데기를 가늘게 펴면 종잇장처럼 얇아진다. 오세윤이 내민 야광패 한 장을 잡아보았다. 얇은 부분은 아트지 80g보다 더 얇은 두께이다. 색패도 마찬가지다. 살짝 힘만 주면 부서질 것 같았다. 솔잎처럼 직선 모양의 자개를 만들 땐, 이것을 섬세한 작두나 칼로 가늘게 끊어놓는다. 끊어놓은 자개는 마치 바늘 같다. 꽃잎처럼 형태가 복잡한 것은 가는 톱이나 줄로 다듬어야 한다. 종이처럼 얇은 이 색패와 야광패를 톱이나 줄로 다듬는다고? 그것도 바늘처럼 가늘고 좁쌀처럼 작은 자개조각 하나 만들자고?
 
작업실에는 그렇게 작은 자개를 박아 만든 작품들이 걸려 있었다. 2007년에 45억 2천만 원이란 경매가를 기록했던 고 박수근 화백의 '빨래터'를 자개로 만든 작품도 있다. '박수근 원작'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똑 같다. 자개가 촘촘하게 박혀 있는 것이 정말이지 박수근의 마티에르기법(질감을 살린 회화기법)을 그대로 느끼게 한다. 해바라기 같기도 하고, 먼 우주의 별이 폭발하는 순간 같기도 한 작품을 보고 있을 때는, 정말 하늘의 모든 별이 쏟아져 내려와 박힌 것 같았다.
 
▲ 박수근 화백의 그림 '빨래터'가 오세윤의 손끝에서 나전칠기로 변신했다. 촘촘하게 박혀 있는 자개가 질감을 살린 박수근의 마티에르기법을 그대로 느낄 수 있게 한다.
오세윤과 그의 작업을 취재하는 동안 몇 번이고 물어보고 싶었으나 실례가 될 것 같아 참고 있던 질문이 마침내 나오고야 말았다. "그런데, 선생님, 왜 이렇게 어려운 작업을 하세요?" 그는 말없이 웃었다. 작업실이 있는 마을이 택지개발 탓에 사라지는 올 겨울, 그는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가야 한다. 전통 자개장롱의 인기는 시들해졌고, 어려운 작업과정에 뛰어드는 사람도 없다. 그러나 오세윤은 전통 나전과 옻칠에 현대적인 감각을 더해 자신만의 작품을 계속 하고 있다. 그의 손끝에서 깊은 바다를 고향으로 하는 자개가, 하늘의 별이 되어 다시 빛날 것이다. 화려하고 또, 섬세하게. 

>> 오세윤
부산미술대전 제30회 대상. 부산미술대전 초대작가. 부산미술대전 심사위원 역임. 대한민국 옻칠 공모전 금상. 부산 국제아트페어 초대 작가. 한국미술협회, 부산미술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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