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 벼슬아치·여행자 위한 숙박시설
옛 인문지리서에도 기록 남아 있어
도둑골·앵두골 등 지명도 그대로 전해
대동면사무소 위치한 대동면의 중심지


"대동면사무소가 있는 원지마을, 대동의 중심입니다."
 
대동면에는 30개가 넘는 마을이 있는데, 그동안 방문한 마을은 18곳이었다. 대동푸른뜰작은도서관(본보 9월 4일자 14면 보도)의 김정도 관장은 "대동면에서 가장 중요한 마을인데, 아직 안 다녀왔느냐"며 원지마을의 이광희(43) 이장을 직접 소개해주었다. 그러고 보니, 대동면의 여러 마을을 방문하면서 원지마을은 수 십 차례 '통과'하기만 했다. 조금은 미안한 마음으로 대동면의 중심인 원지마을을 찾았다.
 
대동면은 김해부(金海府)의 아래쪽이고 가장 동쪽에 위치해 있다고 해서 하동면(下東面)으로도 불렸다. 하동면사무소는 원래 초정마을에 있었는데, 1914년에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1920년대에 원지마을로 옮겼다. 1924년 원지마을에 하동공립보통학교(현재 대동초등학교)가 개교했다. 조눌리에 있던 주재소도 원지마을로 옮겨왔다. 하동면의 이름이 대동면으로 바뀐 것은 1944년이다. 지명의 발음이 '하등'과 비슷해 느낌이 좋지 않다는 주민들의 의견이 많아 대동면으로 바뀌었다. 원지마을은 1920년대부터 지금까지 명실공히 대동면의 중심이다. 현재 183가구에 314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전에는 쌀농사를 지었지만, 지금은 화훼와 토마토·부추 농사를 주로 한다. 그래도 가족이 먹을 것은 직접 농사를 지어 해결하는 집이 많다.
 

▲ 대동면 원지마을 삼거리. 조선시대 인문지리서에 '초령원'이라는 숙박시설의 존재가 기록돼 있을 만큼 교통의 요충지였다. 김병찬 기자 kbc@
조선 중종 때의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초령원(草嶺院)이 김해도호부에서 남쪽으로 30리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영조 때 전국의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만든 책인 <여지도서>에는 '초령원이 김해도호부에서 남쪽으로 30리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는 기록이 있다. 원(院)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공무로 여행하는 벼슬아치나 일반인 여행자들을 위해 관아 근처나 역 부근 또는 역과 역 사이에 설치했던 숙박시설이다. 원지마을이라는 이름은 초령원 터 부근에 형성된 마을이라고 해서 만들어졌다. '원지'의 이름에는 초령원의 흔적이 남아 있는 셈이다.
 
조선시대 때 김해는 자여도를 이용해 중앙과 교통했다. 자여도는 창원과 김해를 중심으로 하는 중·서부 경남의 역로였다. 김해부에서 활천고개를 넘어 남역원(현재 삼정동)을 지나, 대동면 초정리의 초령원과 덕산리의 덕산역원을 거쳐, 월촌리의 월당진에서 낙동강을 건넜다. 강을 건너면 양산 물금의 황산원이었다. 원지마을은 조선시대 교통의 요충지였고, 지금도 차량 통행이 많은 지역이다.
 
원지마을 북쪽에는 도둑골이라는 지명이 전해온다. 장사꾼, 벼슬아치, 과거를 보러가는 선비 등 많은 사람들이 교통의 요충지인 원지마을을 지나니, 이들을 노린 도둑이 출몰했던 모양이다. 원지마을에 살던 순박한 백성들도 피해를 보았을 터. 마을이 교통의 요지이다 보니 그런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 또 하나 앵두골이라는 정겨운 이름도 있다. "마을에 큰 앵두나무가 있고, 지금도 웬만한 집에는 한 두 그루씩 있어요. 그래서 그런 이름이 전해져 옵니다." 이광희 이장의 설명이다.
 
대동면의 어느 마을보다 활기가 넘치는 원지마을은 예부터 전해져 온 아름다운 풍속을 그대로 이어간다. 매년 정월대보름에는 마을 뒷산 당집에서 마을 주민들의 평안을 기원하는 당산제를 올린다. 오래전부터 시작된 '청우회'라는 마을 남정네들의 모임은 현재까지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청우회는 청년부와 장년부로 나뉘는데, 현재 50여 명이 회원으로 가입해 있다. 마을의 좋은 일 궂은 일에 나서 일하고, 초상이 나면 상여도 멘다.
 
지난달 25일에는 마을 어르신들을 모시고 경로잔치도 열었다. 대동초등 운동장 그늘진 곳에 큰 솥을 걸고, 오리 25마리를 고아 어르신들에게 대접했다. 청우회 회원들과 부인들이 총동원됐다. 이날 경로잔치에는 한 마을 어른의 사위가 선물도 했다. 참치를 잡는 원양선박 회사에 다니는 사위가 길이 1m가 넘는 참치를 가져와 어르신들 앞에서 직접 회를 떴다. 그 자체가 큰 구경거리였단다. "오전에 준비해서 오후 4시쯤 끝났는데, 흐뭇해하시는 어르신들 뵈면서 피곤한 줄도 몰랐습니다. 어른을 공경하는 미풍양속, 이웃집의 자녀들까지 안부를 챙겨주시는 어르신들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이어갑니다." 이 이장이 설명하는 경로잔치의 풍경은 말만 들어도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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