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이나 버스를 탔다고 가정하자. 빈자리가 생겼을 때 제일 먼저 눈썹이 휘날리도록 뛰어가는 사람은? 또 대형마트, 대박세일의 날이라고 상상해보자. 선착순을 외치는 판매대를 향해 불사항전의 기운을 뿜으며 입구부터 100m 달리기도 서슴지 않는 사람은? 혹시 당신이 예상한 그 사람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아줌마? 이들이 과연 정답일까? 당신의 케케묵은 선입견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당신의 뇌리 깊은 곳에 낡은 유물처럼 새겨진 아줌마의 정의는, 교양이라고는 눈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고 공짜에 사족을 못 쓰며 목소리는 또 얼마나 큰지 통화의 모든 내용을 생중계로 진행하는 여성과 남성의 중간자적 성(性) 정도로 저장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빈자리를 향해 질주하는 사람은 다리가 아픈 사람이다. 보편적인 사실이다. 대박세일은 요즘처럼 물가가 비쌀 때에는 아저씨 아줌마 할 것 없이 우리 모두를 달리게 만드는 매혹적인 아이템이다. 그러하니 위에서 제시한 시답잖은 문제의 답은 아줌마를 포함한 대다수의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예전에 있었을 지도 모를 하나의 사실을 전체로 일반화시키는 오류에 빠져있는 것 같다. 폄하의 늪에 빠져 그녀들의 건강한 에너지를 간과하고 있지는 않은 지 한번 정도는 생각해봐야 한다.
 
생림면 봉림산업단지 조성에 반대하는 주민들의 중심에는 아줌마들이 있다. 1인 시위를 하고 반대 서명을 받으며 부당함을 알려나가는 그녀들의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있다.
 
밀양에서 만난 아줌마들의 눈빛은 따뜻하고 강렬했다. 내 아이만을 생각하고 내 가정만을 지키겠다는 보신주의는 티끌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르신들의 아픔에 누구보다 공감했고 앞으로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을 걱정했다. 국가의 무차별적인 폭력과 도농 간의 불평등한 관계에 대해서도 분노했다. 그 걱정과 분노는 그녀들을 행동하게 했다.
 
부산, 김해는 물론이고 울산, 거제, 통영, 남해 등지에서 달려온 그녀들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길 위에 누운 어르신들의 곁을 지켰다. 아이들이 유치원이나 학교에 가고 나면 다시 밥을 하고 국을 끓였다. 정성스럽게 밑반찬을 준비하고 그곳에 혹여 필요한 물품들은 없는지 꼼꼼히 체크했다. 그리고는 평리로, 바드리로 어르신들을 찾아갔다. 수시로 올라와 어르신들의 신경을 긁어재끼는 한전 직원과 매 순간 직면하게 되는 경찰들과의 몸싸움을 막아서는 것도 그녀들의 몫이었다. 수확시기를 놓친 농작물을 손보는 일에도, 한시도 편안한 잠을 주무신 적 없는 어르신들의 어깨를 주물러 드리는 일에도 그녀들은 빠지지 않았다. 어르신들이 목에 건 쇠사슬을 그녀들은 자신들의 목에도 걸었다.
 
한전을 비롯한 보수언론에서는 이런 그녀들을 외부 불순 세력이라고 규정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종북 좌파 세력이라는 이름도 붙였다. 여태껏 아줌마라는 이름에 덧대어진 수많은 모욕과 편견들보다 훨씬 자극적이고 무서운 말들이다. 옳지 못한 일에 분노하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일이 언제부터 이렇게 불순한 것으로 취급되는 나라가 된 것일까. 우리 아이에게도 자신의 문제가 아니면 외부 불순 세력이 될 수 있으니 아무리 친구가 따돌림을 당하고 힘들어 해도 모른 척 해야 한다고 가르쳐야 하나.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누가 판단하고 재단하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밀양에 계신 아버지, 서울에 사는 아들. 그렇다면 서울에 사는 아들은 내부세력일까 외부세력일까. 손은 이제부터 손바닥과 손등으로 이분되어야 마땅한 시대가 온 것인가. 국가 권력이 국민 위에 군림하는 비상식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 나라는 엄연한 민주주의 국가다. 그러므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힐 수도 있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합법의 테두리 안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도 있다. 그러한 행위를 두고 외부세력이니 종북 좌파 세력이니 하며 매도해서는 안 된다.
 
아줌마의 다른 이름은 어머니다. 기형도 시인이 노래한,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들이다. 여리고 아픈 것들을 본능적으로 감싸고 젖을 물리는 곱고 강인한 마음이다. 부당함으로부터 정의를 지키고자하는 거룩한 힘, 바로 아줌마의 힘이다.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