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 음경 즐겨 먹으며 병적 정력 보강
소변도 자주 봐 '축천원' 환약 사용 기록


최근 사극의 돌풍이 무섭다. 특히 '광해'와 '왕의 남자'는 관객수 1천만 명을 돌파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영화로 기록되고 있다. 연산군은 한의학적으로 참 언급할 부분이 많은 왕이다.
 
조선시대에는 4대 사화(士禍)가 있었다. 훈구파와 사림의 파워게임이 빚어낸 무오·갑자 2차례 사화의 중심에는 절대권력을 추구했던 연산군이 있다. 연산군의 황음무도는 아버지 성종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성종은 주요순 야걸주(晝堯舜 夜桀紂)라는 당시의 평처럼 정소용·엄숙 같은 후궁들을 총애해 폐비 윤씨의 질투를 샀다. 그녀는 질투의 도가 지나쳐 중궁의 자리에서 폐위되어 1479년 사사(賜死)되었다. 연산군의 나이 불과 3세 때였다. 때문에 어머니의 사랑없이 자란 연산군의 훗날 폭정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때문이었다는 분석이 타당해 보인다. 살부혼모(殺父婚母)로 요약되는 정신적인 결핍은 아버지와 관계되는 모든 것에 대한 적대감과 쇄골표풍과 같은 잔인하고 포악한 형벌의 집행으로 이어졌다. 그 와중에 무오·갑자사화가 발생했다.
 
성종의 호색과 모후의 폐위·사사는 연산군에게 정상적인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게 하였고, 정신의학적으로 구강기적 성격의 고착을 갖게 했을 것으로 보인다. 구강기적 성격은 폭식과 폭음, 윤리를 떠난 쾌락의 추구로 드러난다. 연산군은 이동식 러브호텔인 '거사(擧舍)'를 만들어 궐밖 행차를 함은 물론, 당시 관기였던 수백 명의 흥청(興淸)과 음주가무를 즐기고, 만취하면 질펀한 육체의 향연을 벌였다. <연산군일기>를 보면 수많은 기생뿐만 아니라 선왕의 후궁들, 양반의 부인들, 비구니 등 상대를 가리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 중 박원종의 누이였던 월산대군의 부인도 있었다. 이는 훗날 12년의 폭정을 종식시키는 중종반정의 기화가 된다.
 
20대의 창창한 나이라도 그 많은 여성들을 상대하려면, 보양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백마·개·소의 고기나 음경을 즐겨 먹었다. 한의학적으로 보면 이류보류(以類補類)의 관념에 따라 생식기의 기능을 향상시키기 위해 다른 짐승이나 맹수들의 생식기를 먹은 것이다. 특히 노루의 생식기와 소고기를 좋아했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소고기는 '사람의 근골을 강하게 하고, 허리와 다리를 보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길에서 수레를 끄는 소를 빼앗아 도살하고, 창덕궁 후원에 마굿간과 동물원을 두어 자신의 정력을 보강하려 하였다.
 
연산군 1년, 연산군이 소변을 자주 보아 '축천원'(縮泉元·빈뇨에 쓰이는 환약)을 올리고, 바지에 헝겊을 덧대고 버선에 모피를 붙여 하부를 따뜻하게 하면 이 증세는 없어질 것이다'라고 승정원에서 진언한 기록이 보인다. 야간 빈뇨는 체온유지라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 소변 배출은 노폐물 제거, 체온유지의 2가지 기능이 있다. 나이가 들수록 체온유지 능력은 떨어지게 마련이다. 몸이 냉해지기 쉽다. 특히 야간에는 체온이 더 떨어진다. 방광에 모인 오줌을 데우자면 체열이 더 필요하다. 소변을 조기에 배출하여 체내 수분량을 줄이고 체열소모 대상을 줄이는 것이 인체의 선택이 된다. 이것이 야간 빈뇨의 이유이다. 한의학에서는 이것을 '양기(陽氣)'라고 표현했다. 야간 빈뇨를 막는 체열을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체를 쓰는 운동이다. 빈뇨와 정력의 저하로 고민하는 남성들에게 백마나 노루의 생식기보다 하루 30분씩 걷는 것이 훨씬 보약이 될 수 있음을 연산군이 알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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