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쓴 편지를 받아 본 기억이 희미하다. 아니, 손으로 직접 편지를 쓴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휴대폰과 이메일로 간단하게 할 말을 주고 받은 지 오래다. 배달되는 우편물 뭉치 안에서도 편지가 사라졌고, 봉투에 적힌 내 주소 역시 주소 라벨에 인쇄된 것이다. 내가 아는 사람들이 어떤 글씨체를 가지고 있는지는 아예 알 도리가 없는 세상이다. 이제 우리는 자신의 감정조차 'ㅋㅋ' 혹은 'ㅠㅠ'로 표현하고 있다. 기쁨과 슬픔이라는 감정이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닐텐데 말이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예술가의 육필편지 49편이 실린 '편지로 읽는 슬픔과 기쁨'을 읽었을 때 가슴이 뭉클했던 이유는 편지를 주고받던 시간들이 그리워졌기 때문이 아닐까. 영인문학관 강인숙 관장이 오랫동안 모아온 문인과 예술가들의 원고와 편지와 물품 2만5천여 점 중에서 편지 49편을 모아 소개했다.
 
최근 작고하신 박완서 선생을 비롯해, 유치환, 노천명, 이광수, 서정주, 전혜린, 조정래, 백남준, 장영주 등 예술가들이 직접 쓴 편지들이다. 아내에게 보내는 사랑편지, 아들에게 보내는 가족편지를 비롯해 문인들이 서로 주고받은 편지, 작가들의 미적 감각을 엿볼 수 있는 연하장도 볼 수 있다. 문학평론가로서 작가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영인문학관 강인숙 관장이 편지만으로는 부족한 배경지식과 뒷이야기들을 소개하고 있어 편지를 쓸 당시의 사연과 마음도 짐작해볼 수 있다.
 
'태백산맥' '아리랑' 등 우리 근대사를 담은 대하소설을 쓴 조정래 작가가 아내 김초혜 시인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작가의 마음에 얼마나 고운 심성이 자리하고 있는지 새삼 느끼게 된다. "사랑하는 여보, 초혜! (중략) 당신과의 23년 세월, 세월이 쌓일수록 당신을 아내로 얻었음을 하늘에 감사하게 되오. 당신도 나를 남편으로 얻었음이 나와 같기를 바라는데, 그렇지 않을까 봐 두렵소. 오늘 아침나절에 놀라움이 깃든 음성으로 머리칼을 헤쳐 보였을 때 나는 우리의 삶 23년을 순간적으로 떠올렸고, 부끄러운 듯 숨어 있는 흰 머리카락들마저 대견하고 사랑스러웠소. (후략)" 1985년 가을 밤에 쓴 이 편지에는 '죽는 날까지 당신을 사랑할 당신의 남편 정래'라고 적혀 있다.
 
만난 지 100일이 된다고 기념일을 챙기고 온갖 말로 연인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데 익숙하지만, 결혼 한 지 23년이 지난 후에도 이런 편지를 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종이에 눌러쓴 한 글자 한 글자 자국마다 애정이 듬뿍 고여 있는 조정래 선생의 편지를 읽으면서 무려 6년 동안 부부 사이에 단 한마디의 말도 없이 쪽지로만 의사소통을 하며 살다가 최근 법원으로부터 이혼판결을 받은 노부부의 사연이 떠올랐다.
 
책을 펴낸 강인숙 관장은 편지의 힘을 "편지는 수신인 혼자서만 읽는 호사스런 문학이다. 그것은 혼자서 듣는 오케스트라의 공연과 같다"고 말한다. 세상의 단 한사람에게 보내는 사연, 오직 나를 위해서만 쓴 글이 편지이다. 그 편지를 읽을 때 보내는 사람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한 느낌까지도 함께 전해지는 것이다.
 
책 속의 작가들이 가족을 걱정하고, 지인들의 안부를 묻고, 정성들여 그림을 그린 연하장을 보냈던 그 순간의 마음을 수많은 사람들이 공유한다는 것이 어쩌면 개인의 사생활을 침범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긴 세월 동안 그들의 작품을 통해 감동과 깨우침을 느끼며 살아왔으니, 이번에는 문인과 예술가들의 작품 이면 속마음을 엿보는 보너스 정도는 받아도 괜찮지 않을까.
 
문득 편지 한 장 쓰고 싶어지는 마음도 든다. 할 말만 간단하게 전달하던 메시지가 아니라 내 생각과 마음을 전해줄 이야기를 차분하게 쓰고, 봉투에 이름과 주소를 또박또박 쓰고, 우표도 부치고, 그렇게 편지를 보내고 싶다.

강인숙 지음/마음산책/248p/16,000원







박현주
북칼럼니스트, 동의대 문헌정보학과 강사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