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의 김해 평야는 옛 가야시대만 해도 바다였을 정도로 김해는 바다와 인접한 포구였다. 바다와 인접한 곳에 가야시대 궁궐터와 해상포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봉황대 유적지가 있다. 사진은 봉황대 유적지의 회현리 패총 전경.
#장면 1

"엄마, 배가 들어오고 있어요." 

이루는 헐레벌떡 움집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아이의 얼굴에는 흥분된 빛이 가득했다. "원, 녀석. 아버지가 오시는 게 그리 좋아?"
 
엄마는 화로에 불을 피우고 있었다. 솜처럼 하얀 연기가 움집 천정으로 뭉게뭉게 올라갔다. 움집 안 한쪽 구석에는 짐승 가죽이 깔린 침상이 있었고, 벽에는 말린 고기와 가죽옷, 생활 도구 등이 걸려 있었다. 
 
"엄마는 저녁을 준비해야 하니까 이루가 바다로 가 보거라."

이루는 신난 표정으로 쏜살같이 움집 밖으로 뛰어나갔다. 나무와 짚으로 만든 움집 위에 연노란 태양빛이 물들어 있었다. 이루는 구릉을 벗어나 산길을 힘차게 내려갔다. 아버지를 보고 싶은 마음에 온 몸이 달아올랐다. 숲에서는 조개참나무와 전나무, 소나무 등이 신선하고 맑은 나뭇잎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아이가 막 숲을 벗어나 바다로 내려가는 길로 접어들었을 때, 얼굴이 해사한 여자 아이가 엄마와 함께 올라오고 있었다. 다미였다. 모녀는 바다에서 조개를 캔 모양이었다. 다미의 얼굴에 뻘이 조금 묻어 있었다. 다미의 얼굴이 피곤해 보였다. 이루의 엄마는 다미에게 무슨 병이 있다고 했다.
 
"다, 다미야. 헥~헥~. 조개 많이 캤니?"
"응. 이루야. 오늘은 어제보다 더 많이 캤어."

이루는 모녀를 지나쳐 냉큼 산길을 뛰어갔다. 다미는 이루의 뒷모습을 보며 방긋 웃음을 지었다. 늘 자기와 놀아주는 이루가 좋기 때문이었다. 바다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다미의 야윈 뺨 위로 연붉은 놀빛이 희미하게 스며들었다.
 

#장면 2

▲ 회현리 패총 발굴 당시 산더미처럼 쌓인 조개 껍데기 더미.
"이루야."

막 배에서 내린 아버지는 이루를 보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는 어깨에 커다란 가죽 보따리를, 손에는 작은 보따리를 들고 있었다. 수염이 덥수룩한 아버지가 이루에게 다가왔다. 포구는 온갖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 중에는 피부가 까만 사람도 있었고, 눈 색깔이 파란 사람도 있었다. 저마다 손에 진귀한 물건들을 가득 들고 있었다. 이루는 신기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이루야. 너 주려고 아버지가 이걸 얻어왔단다."

아버지는 동그란 쇳덩어리 하나를 이루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돈이라고 하는 것이다. 바다 건너 사는 사람들은 이걸로 먹을 것을 바꾼단다."
"헤. 이 작은 걸로 먹을 걸 바꾼다고요?"
"이루야, 그만큼 세상은 넓고 크단다."

아버지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쓱 뒤로 넘기며 성큼성큼 앞장서 걸어갔다. 이루의 아버지는 구야국에서 만든 철 덩어리를 들고 바다 건너 땅에 가서 진귀한 물건들과 바꿔오는 상인이었다. 이루는 자신도 어른이 되면 아버지를 따라 바다 너머 큰 땅으로 가고 싶었다.
 

#장면 3

"다미야, 이게 뭔 줄 알아?"

이루는 화천을 다미에게 내밀었다. 다미는 화천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이게 뭐야?"
"응. 돈이라고 하는 거야. 이걸로 먹을 것도 바꾸고 가죽도 바꾼대. 이상하지?"
"신기한 조화를 부리는 물건이네. 참 신기하다."
"헤헤. 그래 신기하지."

이루는 무척 우쭐한 모습으로 화천을 목에 걸었다.

"이루야. 우리 아버지 있는데 놀러가자."
"그럴까?"
"내가 집에서 볍씨와 조개를 갖고 왔어. 이거 아빠 숯가마에서 구워먹자."
"야, 그거 좋은 놀이구나. 어서 가자."

▲ 굴, 꼬막, 담치, 소라 등이 섞여 있는 패총 단면.
이루와 다미는 손을 잡고 움집에서 조금 떨어진 낮은 구릉 가까이로 걸어갔다. 곧 이어 두 아이는 검은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는 숯가마 움집에 들어갔다.

숯가마 안에서는 쉴 새 없이 벌건 불이 피어올랐다. 다미의 아버지는 얼굴과 손에 흙을 묻힌 채 여러 모양의 그릇을 만들고 있었다.

"어, 이루 왔구나. 다미는 바람도 찬데 집에 있지 않고?"
"조금만 놀고요. 숯불 좀 주세요."

다미의 아버지는 빙긋 웃으며 벌건 숯 하나를 땅바닥에 놓아주었다. 다미는 볍씨 한 무더기를 숯불 위에 놓았다. 파지직 거리며 볍씨에 작은 불꽃이 붙었다. 얼마 있으니 볍씨가 구수하게 익어가는 냄새가 났다.

두 아이는 까맣게 탄 볍씨를 양 손바닥에 올려놓고 비비기 시작했다. 검은 재가 땅바닥에 떨어지고 노랗게 익은 알갱이가 손바닥에 남았다. 이루가 먼저 몇 개를 입에 넣고 오물거리자 다미도 그 모습을 따라했다.

다미는 아버지가 만든 흙 그릇 안에 조개들을 집어넣었다. 아버지는 화로 안에 숯을 집어넣고, 조개가 담긴 흙 그릇을 그 위에 올려놓았다. 조개가 익는 동안 두 아이는 움집 밖으로 나가 돌 장난을 하며 놀았다. 어느새 그들 주위로 한 무리의 아이들이 몰려왔고, 모두들 어울려서 즐겁게 놀기 시작했다. 때는 가을이었고, 청명한 하늘에 조각구름들이 한가로이 떠돌아다녔다.

이윽고, 다미의 아버지가 조개가 가득 든 그릇을 들고 나왔다. 아이들이 모두 둘러 앉아 익은 조개를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이루와 다미는 다 먹고 남은 조개껍데기를 들고 남쪽 낭떠러지로 다가갔다. 낭떠러지 아래에는 굴과 대합, 꼬막 껍데기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 조개껍데기 옆의 북쪽 구릉에는 죽은 사람들을 묻는 묘지가 있었다.

배가 불러진 아이들은 왁자지껄 떠들며 바닷가로 향했다. 바닷가는 아이들에게 언제나 좋은 놀이터였다.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노는 동안 차츰 날이 흐려져 왔다. 하늘에 어느새 먹장구름이 몰려왔다. 그래도 아이들은 놀이를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그제서야 아이들은 급히 바닷가를 빠져나와 움집으로 난 숲으로 뛰어갔다. 비는 어느새 굵은 방울을 뿌려댔다. 아이들의 몸에도 빗방울이 떨어졌고 다미의 머리칼과 몸이 젖어갔다.

이루는 다미의 손을 잡고 바삐 뛰어갔는데, 다미가 콜록거리며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 숲길의 끝에서는 다미 엄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미 엄마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다미를 데리고 급히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루는 멀어져 가는 다미의 모습을 우두커니 쳐다만 보았다.


#장면 4

그날 이후로 다미는 한동안 집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들리는 말로는 다미의 기침이 심해져서 누워 있다는 것이었다. 이루의 엄마는 다미의 얼굴이 무척 안 좋다며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이루는 다미가 아픈 것이 괜히 자신의 잘못인 것 같아 똥마려운 강아지 마냥 안절부절 못 했다.

그렇게 근 달포의 시간이 지나갔다. 다미의 병세는 하루가 다르게 나빠졌고 마을 어른들의 걱정도 커져만 갔다. 이루는 불에 구운 볍씨를 들고 다미 집에 몰래 가보기도 했다. 혹시나 다미가 구운 볍씨를 먹으면 병이 낫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다미는 보이지 않았다. 심심해진 이루는 다미와 함께 놀던 남쪽 낭떠러지로 걸어갔다. 이루는 손에 들고 온 볍씨를 낭떠러지 아래로 버렸다. 볍씨는 바람을 타고 천천히 조개껍데기 사이로 사라졌다. 

▲ 1999년 부산대박물관이 패총을 발굴한지 7년 만인 2006년 개관한 봉황동유적지 패총전시관.
그 다음날이었다. 이루가 일어나보니 엄마 아빠가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루는 다미가 보고 싶었다. 햇살처럼 환한 웃음을 지으며 바닷가를, 숲길을, 남쪽 낭떠러지를 함께 뛰어다니며 놀던 다미가 너무 보고 싶었다.

이루 엄마는 슬픈 표정으로 이루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움집 밖으로 나오니 마을 어른들이 모두 나와 있었다. 그리고 모두들 다미의 집으로 향했다. 다미의 움집 밖에는 커다란 독이 하나 놓여 있었다. 이루는 그렇게 커다란 독을 처음 보았다.

"자, 저 독을 들고 모두 북쪽 구릉으로 가세."

촌장 할아버지가 이렇게 말하자 힘 센 어른들이 커다란 독을 번쩍 들었다.

'다미야, 다미야. 너는 어디에 있니?'

이루는 속으로 다미를 불러보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다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구릉에 도착한 어른들은 커다란 독을 땅 속에 묻기 시작했다. 독이 땅 속으로 들어간 후, 다미 아버지는 여러 개의 흙 그릇을 독 주변에 집어넣었다. 흙 그릇 안에는 다미가 좋아하는 불에 탄 쌀과 조개, 미역이 들어 있었다. 다른 어른들도 저마다 손에 들고 온 물건들을 독 주변에 집어던졌다. 이루 아버지는 조용히 이루에게 다가와 아이의 목에 걸린 화천을 꺼내 독 주변에 던졌다. 이루는 다미의 병이 빨리 나으라고 그리하는가보다 하고 생각했다.

어른들이 독을 땅 속에 파묻고 흙을 그 위에 덮는 동안 다미 엄마는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이윽고 사람들은 뿔뿔이 움집으로, 가마터로, 바닷가로 흩어졌다. 이루 엄마는 이루의 손을 잡고 움집으로 돌아갔다. 이루는 심심했다. 언제나 자신과 놀아주던 다미가 옆에 없기 때문이었다. 빨리 다미의 병이 나아 남쪽 낭떠러지와 바닷가, 북쪽 구릉과 숲길을 뛰어다니고 싶었다. 하늘에서는 까마귀 한 마리가 긴 울음소리를 내며 낮게 날고 있었다. 이루는 속으로 가만히 속삭였다.

'까마귀야, 다미에게 날아가 다미의 병을 물고 멀리 날아가 주렴.'

이런 이루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까마귀는 커다란 독이 묻힌 북쪽 구릉 위를 천천히 맴돌고 있었다.






김대갑 문화유산 해설사·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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