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맞이 명소인 울산 울주군 서생면 간절곶에 가 보았습니다. 하얀 등대 앞 길가에 거무튀튀한 말 한 마리와 마차가 서 있었습니다. 돈을 내면 주변 유람을 시켜주는 모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에게 눈가리개가 씌워져 있었습니다. 말 눈가리개는 말의 양쪽 눈 측면을 가리는 도구를 말합니다. 눈가리개가 씌워진 말은 사람이 유도하는 대로 앞으로만 나아간다고 합니다. 경마장의 경주마들이 이 눈가리개를 하고 있습니다. 바다를 오른편에 둔 채 눈가리개를 한 그 말은 바다를 볼 수 없었고 무척 무기력해 보였습니다. 저는 그 무기력해 보이는 말 앞에서 정신이 사나웠고 난처했습니다.
 
'파블로프의 개'가 있습니다. 먹이를 줄 때 종소리를 울리면 어느 순간부터 종소리만 울려도 침을 질질 흘리는 한심한 개입니다. 그런데, 개만 그런 것일까요?
 
미국의 심리학자 셀리그만은 개를 데리고 파블로프보다 더 잔인한 실험을 했습니다. 셀리그만은 개를 두 집단으로 나누어 우리에 가둔 뒤 전기 고문을 가했습니다. 한 집단의 개는 코로 지렛대를 누르면 전기 고문이 중단되도록 했습니다. 다른 집단의 개는 몸을 묶어서 움직이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한동안 전기 고문을 가했더니, 첫 번째 집단의 개는 전기 고문이 시작되자 지렛대를 눌러 고문을 멈추게 했습니다. 두 번째 집단의 개는 속절없이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런 다음, 셀리그만은 우리 문을 열어놓고 전기 고문을 가했습니다. 첫 번째 집단의 개는 다시 전기 고문이 시작되자 즉시 달아났습니다. 두 번째 집단의 개는 우리가 열려 있었고, 속박을 하지 않았는데도 가만히 앉아 전기 고문을 당했습니다. 셀리그만은 이 현상을 '학습된 무기력'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개만 그런 것일까요?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가 있습니다. 바위섬에 동굴이 있습니다. 동굴의 끝은 벽입니다. 동굴 끝에는 죄수들이 앉아 있습니다. 죄수들은 평생 동안 쇠사슬에 묶인 채 동굴 벽면을 향해 앉아 있습니다. 죄수들은 등 뒤에서 빛이 들어와 벽에 투영된 그림자를 세상이자 우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본 것이라곤 그림자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한 죄수가 우연히 쇠사슬에서 풀려나 동굴 밖으로 나갑니다. 동굴 밖에는 사람과 소와 양과 들판과 해와 달과 별이 있습니다. 이 죄수는 자신이 지금까지 보아온 게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는 동굴 안으로 돌아와 다른 죄수들에게 그 사실을 전합니다. 그러나 다른 죄수들은 그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비웃거나 해치려 듭니다.
 
간절곶의 말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눈가리개를 한 말이거나, 무기력하게 전기 고문을 받아내는 개이거나, 평생 동안 쇠사슬에 묶인 채 돌아앉아 벽에 비치는 그림자만 실재라고 믿는 죄수는 혹 아닐까.
 
새날이 밝았습니다. 푸른 말, 청마의 해입니다.
 
새해에는, '우리는 원래 영혼이 없는 존재'라 자조하며 부당한 지시조차도 묵묵히 감당해 내는 공무원들, 독선에 빠져 특정 이념과 판단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사람들, 아무런 회의 없이 종교에 젖어 사는 신자들, 이런 모든 이들이 마침내 눈가리개를 벗어던지고, 전기충격기를 부수고, 동굴 밖으로 걸어 나와 초원의 청마처럼 주체적 삶을 영위하게 되길 희망합니다. 프란체스코 교황이 지난해 성탄 전야 미사 때 한 말을 주체적 삶을 위한 도구로 삼는 것도 괜찮을 듯합니다. '두려워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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