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황동에서 출토된 '가야의 배'는 3~4세기께 선박으로 확인됐다. 가야 시대 사람들은 봉황동을 국제 무역 항구로 이용해 이 배를 타고 일본과 무역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
분홍 솜망치 같은 구름이 한가로이 떠도는 오월의 어느날이었다. 연붉게 물든 태양이 서쪽으로 천천히 넘어가고 있었다. 이루는 움집들이 모여 있는 봉황대 구릉에서 포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침부터 옥시글거리며 수많은 배들이 오고간 포구는 오후 무렵이 되자 고요한 분위기를 띠었다.
 
이루는 정박한 배들과 창고로 쓰이는 고상가옥, 높은 전망대 등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놀빛이 그의 눈을 가볍게 찔렀고, 바다 위에는 담홍색이 일렁이고 있었다. 태양은 정박한 배들의 이물과 고물 쪽에도 골고루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는 수많은 배들 중에서 유독 양쪽 끝이 한껏 올라간 배 한 척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내일 그는 저 배를 타고 왜의 땅으로 갈 것이다. 이루는 눈을 들어 멀리 신어산 남쪽을 쳐다보았다. 신의 물고기가 내려와 고고한 기운을 간직하고 있는 영묘한 산. 삼 년 전, 그는 신어산 남쪽 자락에 사랑하는 딸 미리를 묻었다.
 
'벌써 삼 년이 흘러갔구나. 이제는 미리를 영원한 곳으로 보내야 겠어.'

때는 마품왕 시대였다. 포상팔국의 2차에 걸친 침략을 막아낸 대가락국은 더 없이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루는 희미하게 보이는 분산성을 응시했다. 삼 년 전, 미리와 채현을 비롯한 수국단원들이 포상팔국의 침략을 막아낸 바로 그 분산성이었다. 딸 미리는 1차 포상팔국 전쟁에서 장렬하게 산화하고 말았다.

이루는 천천히 구릉을 벗어나 아내가 기다리고 있는 움집으로 내려갔다. 그는 보름 전, 마품왕의 호위무사인 채숙 장군과 만났던 일을 머리에 떠올렸다.
 

#2.

채숙 장군은 이루가 마당으로 들어서자 밝은 미소로 맞이했다. 마당 가운데에는 여러 개의 궤짝이 쌓여 있었다. 아래 위로 하얀 옷을 단정히 입은 이루는 조심스럽게 장군에게 다가갔다.
 
"중국에 다녀 오시느라 수고하셨소. 이번 무역은 소득이 많았다고 들었소이다."
"예. 장군. 양나라와 송나라 대상을 만나 철정(가운데가 잘록하고 양쪽 끝에 이르면서 폭이 넓어지는 간단한 모양의 쇠판)을 전해주었고, 소금과 비단, 곡물을 가져왔나이다."
"수고했군요. 항상 행수에게 고맙구려."

채숙 장군은 이루에게 고마운 미소를 지었다. 무골풍인 장군의 턱에서 흰 수염이 휘날리고 있었다. 선왕인 거등왕 때부터 이루의 집안은 철정을 수출하는 중책을 맡고 있었다. 이루의 아버지도 평생 동안 바다를 오가며 대가락국의 해상 무역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람이었다. 실상 이루 같은 대상들이 대가락국을 먹여 살리는 셈이었다.

"이루 행수, 금명간 야마타이국에 좀 다녀와야겠소."
"무슨 분부이시온지…."
"이 궤짝 안에는 비단과 철정, 황금이 들어 있소. 이걸 야마타이국의 비미호 여왕에게 전해주시오. 대왕의 어명이오. 그리고 이 밀지도 함께."
"잘 알겠습니다."

이루는 밀지를 받아 품 안에 소중히 넣었다.

▲ 봉황동 유적지의 고상가옥 앞 연못에 떠 있는 '가야의 배'.
"또한 이번 행차에는 특별한 일이 하나 있소."
"그게 무엇입니까?"
"야마타이국의 배와 우리 가락국의 배를 바꾸는 것이라오."
"무…."
"허허. 갈 때는 우리 가락국의 배를 타고 가고, 올 때는 야마타이국의 배를 타고 오면 되는 것이라오."
"아! 그런 말씀이옵니까?"
"야마티아국은 우리 가락국의 분국으로서 모든 문물이 우리와 비슷하오. 그런데 배에 사용하는 나무가 조금 달라요."
"맞습니다. 우리 가락국은 소나무로 배를 만들지만 야마타이국은 삼나무와 녹나무를 섞어서 만들지요."
"이번에 배를 교환해서 양국의 신뢰를 돈독히 하겠다는 것이 대왕의 뜻이오."
"잘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따로 이루공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오."

장군은 하녀를 시켜 작은 궤짝을 가져오라 일렀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궤짝을 한 번 열어보시오."

이루는 궁금한 표정으로 궤짝을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배 모양의 토기와 토제 방울이 들어 있었다. 그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신물들은 신분이 높은 자들의 장례에 사용되는 비싼 것이었다. 이루같이 낮은 신분의 사람들은 사용하기 힘들었다.

"이 귀한 신물을 어찌 저에게…."
"공의 딸 미리가 죽은 지 삼 년이 다 되어 갈 것이오. 채현의 것을 준비하면서 미리의 것도 마련했소. 우리 딸들의 영혼을 이제는 편안히 보내야겠지요."

이루의 눈가에 맑은 이슬방울이 맺혔다. 그는 배 모양의 토기를 품에 안고 채숙 장군에게 고개를 숙였다.

"장군, 감사합니다. 따님이신 채현 아씨도 유명을 달리했거늘 미천한 저에게까지 신경을 써주시다니."

채숙 장군은 이루공의 손을 잡고 숙연한 미소를 띠었다. 그 미소 속에는 대가락국을 위해 딸들을 바친 아버지들의 마음이 고이 녹아 있었다.
 

#3.

"행수 어른, 야마타이국이 보입니다."
 
이루는 곁으로 다가온 철숙의 말에 머리를 들었다. 아스라이 펼쳐진 수평선 위로 검은 점들이 떠 있었다. 크고 작은 섬들이 푸른 물결 너머로 그의 눈에 들어왔다.
 
"하선할 준비를 하라고 이르게."
"예. 행수 어른."

철숙은 정중히 인사를 한 후 뒤돌아서서 선원들에게 하선 준비를 명령했다. 배는 서서히 야마타이국의 연안으로 접근했다.

포구에 배를 정박한 이루 일행은 여러 개의 궤짝을 메고 여왕의 궁으로 향했다. 섬나라 특유의 습한 기운이 몰려왔지만 길거리의 풍경은 가락국과 비슷했다. 삼각형 모양의 움집들이며 높다란 고상 가옥, 말을 탄 무사들의 호위 행렬, 평평한 이마를 가진 젊은 아가씨들. 가락국의 어느 마을에 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야마타이국은 바로 가락국 그 자체였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울창한 삼나무가 많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하늘을 찌를 듯이 쭉쭉 뻗어간 삼나무. 그건 가락국의 위상이 바다 건너 미지의 땅에까지 뻗어나간 것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늘은 물속에 담긴 금강석처럼 더없이 맑았다. 이따금 가까운 들에서 향기를 머금은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4.
이루 일행은 화려한 금칠을 한 궁궐 정문을 보고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대가락국의 봉황대 궁궐보다 크기는 작았지만 아름답고 황홀한 느낌을 주는 궁이었다. 정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섬세하면서도 아담한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정원 사이를 흐르는 작은 실개천은 가락국 해반천을 축소한 듯한 모습이었다. 맑은 물위에 은린이 반짝였고, 은어와 잉어들이 노닐고 있었다. 이루 일행은 개천 사이에 놓인 다리를 건너 소담하게 생긴 내전으로 들어갔다. 이루 일행이 자리를 잡자 그들의 눈앞에서 몇 개의 방문이 연이어 열렸다. 그리고 그 끝에 작은 발이 내려와 있었다.
 
"어서 오시오. 이루 행수."

발 너머에서 향긋한 냄새가 풍겨오면서 그윽한 음성이 들려왔다. 발 사이로 화려한 비단 옷을 입은 여인의 얼굴이 어렴풋이 보였다. 비미호 여왕이었다.

"그래. 마품왕께서는 안녕하신가요?"
"예. 대왕께서는 평안하십니다. 전하에게 따뜻한 안부를 전하셨습니다."
"호호. 조카가 내 오라버니의 뒤를 이어 훌륭하게 다스리고 있군요. 내 항상 어머니 나라인 대가락국을 잊지 않고 있지요."
"대왕께서 여러 선물과 편지를 주셨습니다."

이루는 품 안에서 황금색 밀지를 꺼내 내관에게 전해주었다. 편지와 선물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하는 비미호 여왕.

"정성이 담긴 고향의 선물을 받으니 기쁘기 한량없군요. 내 그에 대한 보답으로 파형동기와 몇 가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대왕께 잘 전달하겠습니다."
"가락국의 배와 우리 야마타이국의 배를 교환하는 것은 양국의 친선 관계를 돈독히 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가서 전하세요. 야마타이국은 대가락국의 아들 나라임을 한시도 잊지 않고 있다고."
"꼭 그리 전하겠습니다."

비미호 여왕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루 일행도 얼른 일어나 예를 갖췄다. 내전을 나서니 어느새 담황색 놀이 마당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백토 위에 드리운 놀빛은 고향의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5.
열흘 후, 이루 일행은 야마타이국의 포구에 도착하여 날렵한 배 위로 올라갔다. 그 배는 삼나무로 만들어졌으며 전체적인 모양은 가락국의 배와 비슷했다. 길이는 백 척에 갑판 넓이는 삼십 척 정도 되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가락국 배보다 날씬한 모양새라는 것이었다. 야마타이국의 거친 물살을 헤쳐나가기 위해 뱃머리의 각도를 좀 더 예리하게 만든 것이었다.
 
"훌륭한 배군요."
"허허. 비록 이곳에서 만들었지만 가락국의 배와 똑같습니다. 가락국의 배가 형님이라면 이 배는 아우인 셈이지요."
"맞습니다. 가락국과 야마타이국은 이 배들처럼, 저 바다처럼 한 형제이지요."

이루는 마중 나온 내관 어사벌과 말을 주고받으며 바다를 쳐다보았다. 수평선과 맞닿은 하늘이 푸른빛을 띤 채 쇠붙이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로부터 열흘 후, 이루 일행은 거친 풍랑을 이겨내고 마침내 봉황대 포구에 도착하였다. 이루의 배가 포구로 들어오자 처음 보는 낯선 배를 구경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배를 만드는 장인들도 몰려와 삼나무로 만든 배를 구경하고 있었다. 모두들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야마타이국에서 만든 배이긴 하지만 가락국의 배를 그대로 본 떠 만든 배였기 때문이었다.
 
그날 저녁. 이루와 아내 추미는 횃불을 들고 포구로 다가갔다. 포구에는 낮에 이루가 몰고 온 배가 유적하게 앉아 있었다. 부부는 말없이 흑빛 바다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이루는 품 안에서 배 모양의 토기와 토제 방울을 꺼냈다. 불빛을 받은 토기는 연노란 빛을 띠고 있었다. 오늘은 미리가 죽은 지 삼 년 째 되는 날이었다.
 
아내 추미의 눈가에 이슬이 촉촉이 맺혔다. 이루는 배 모양의 토기를 바다 위에 띄워 보냈다. 토기는 잔잔한 물결을 따라 바다로 나아갔다. 야마타이국에서 만든 배를 지나서 파도를 헤치며 점점 더 멀리 나아갔다. 미리의 하얀 얼굴이 그 배에서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삼나무로 만든 배에도 미리의 미소가 잔잔하게 퍼지고 있었다. 그 배는 봉황대 포구에 영원토록 머물러 있을 것이다.






김대갑 문화유산 해설사·여행작가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