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족장의 아들, 야로
초저녁이었지만 밤공기는 차가웠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언덕에 작은 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열다섯의 작은 움집들. 긴 원뿔형으로 이루어진 움집들은 누런 갈대로 만든 것들이었다. 갈대들은 바닷가 근처의 모래밭에서 채취한 것임이 분명했다.

▲ 수로왕릉에 있는 고인돌. 바위의 표면에는 시간과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착색돼 있다.
임종 직전의 부족장 수노 "거북 머리 언덕 위
신령스러운 나무 앞에 나를 묻어다오"
아들 야로는 아버지 유언대로 유골을 모셔두고
수노가 평소 쓰던 물건들을 함께 묻은 뒤
장정들과 함께 거대한 돌을 옮겨 덮으며
"훗날 천손께서 부족장의 무덤을 알아보시길"

육란이 모셔진 언덕에 오른 한석봉
거대한 반석 하나를 발견한 뒤 "이 돌이구나!"
지필묵을 꺼낸 뒤 '龜旨峯石'이라 써내려갔다

 

붉은 빛을 띤 반달이 남쪽 하늘에 음산하게 걸려 있었다. 그 반달 뒤로 삼태성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북쪽 언덕에서 바람이 불어오자 반달과 삼태성이 가볍게 흔들렸다. 정적이 감도는 움집 마을. 개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마을에 무슨 변고라도 벌어진 것인가? 이상하리 만치 사람들의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런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유독 마을 중앙에 있는 가장 큰 움집에서 희미한 모닥불 빛이 새어나왔다. 다른 움집들을 자식처럼 거느리는 아버지와 같은 중앙움집이었다. 그리고 그 움집에서 여자들의 작은 흐느낌과 남자들의 한숨소리가 새어나왔다.
 
실내는 무척 무거운 분위기였다. 밖에서 보기보다는 무척 넓고 큰 실내였다. 사람들이 한 사람을 가운데에 두고 빙 둘러싸고 있었다. 가운데에는 갈색 피부에 흰 머리를 산발한 중년 사내가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었다. 임종이 임박한 사내였다. 사내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내의 앞에는 칠흑처럼 검은 머리카락과 표범 무늬 가죽옷을 입은 건장한 청년이 숙연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중년 사내는 움집 마을의 부족장인 수노였고, 청년은 그의 아들 야로였다.
 

#2.귀인을 맞을 준비를 하라
"아버지, 아버지! 흑흑."
 
야로의 여동생으로 보이는 처녀가 아버지를 부르며 구슬피 울고 있었다. 그녀를 따라 몇몇 여인들도 눈물을 흘렸다. 야로의 옆에는 패각 목걸이와 잿빛 지팡이를 짚은 영교가 청동방울을 울리며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야로는 바짝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그의 나이 겨우 19세. 아직 부족을 이끌기에는 한참 모자라는 나이였다. 야로는 두려웠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어떻게 자신이 부족민들을 이끌어야 할지.

"야, 야로야."

수노는 희미하게 눈을 뜨며 야로를 불렀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부족장에게로 쏠렸다. 그들은 실낱 같은 희망을 안고 있었다. 혹시 부족장이 회생할지도 모른다는.

"아, 아버지. 이제 정신이 드세요?"

야로와 그의 여동생은 급히 수노 곁으로 다가갔다.
 
"야… 야로야. 내… 내 이제 삼태성에게 갈까 한다. 쿨럭~ 쿠울럭."

부족장 수노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전에 내 너에게 긴히 할 말이 있단다."
"아버지. 그 무슨 말씀이세요. 삼태성에게 가시다니요? 오래도록 살아 계셔서 저희 부족을 이끄셔야죠." "수노 어른. 조금만 버티십시오. 반드시 살아 날겁니다."

마을의 원로 중 한명인 치우가 간절한 눈빛으로 수노에게 말했다.

"허…. 아, 아니오. 나는 이제 가야 할까 보오. 치우께서 우리 야로를 잘 보살펴 주시오."
"편히 가십시오. 운명은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사라지는 것. 이 모두가 하늘의 뜻입니다."

무녀인 영교는 온화한 미소로 수노에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수노는 적이 안심되는 표정을 지었다.

"야, 야로야. 나를 거북이 누워있는 언덕으로 보내거라. 작은 언덕 위에 신령스런 나무가 한 그루 있을 것이다. 그 나무 옆에 거북의 머리가 있을 것이다. 그 머리 쪽에 나를 묻어다오."
"거북이가 누워 있는 곳? 그곳이 어딥니까?"
"사… 삼태성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그, 그곳은 신령한 땅. 먼 후일, 이 땅을 다스릴 귀한 사람께서 내려오실 때, 나의 몸뚱이가 작은 길잡이를 할 터…."

부족장 수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눈동자가 슬며시 풀리는가 싶더니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무녀는 청동방울을 딸랑이며 육신에서 벗어나는 수노의 영혼을 위로하기 시작했다. 주변에 모여 있는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 슬픈 빛이 묻어났다. 모두의 표정에는 궁금증이 일었다. 누워있는 거북이, 신령한 땅, 귀인….
 
영교의 청동방울이 길게 울리는가 싶더니 부족장 수노의 얼굴이 옆으로 젖혀졌다. 평온한 미소가 감도는 수노의 얼굴 위에 무녀는 청동 거울과 청동 방울을 놓아주었다. 붉은 반달이 차츰 서쪽 하늘로 넘어갔고, 삼태성 별빛이 뒤로 물러났다. 삼태성 옆으로 작은 별똥 하나가 휙하며 땅으로 떨어졌다.
 

#3.구지봉에 자리 잡는 고인돌
"자, 조금만 더 힘을 내세!"
 
여명이 밝아 올 즈음이었다. 치우는 두 팔을 휘저으며 마을 사람들을 독려했다. 때는 초봄이었다. 붉은 빛을 받은 노란 진달래들이 풀숲에서 바람따라 가볍게 흔들리고 있는 날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거대한 돌 하나를 언덕으로 올리고 있었다. 이웃 마을 사람들도 함께 돌을 옮기고 있었다. 족히 백명은 되는 장정들이 달라붙은 대 역사였다.
 
"어기~ 여차~"
 
장정들은 치우의 지휘에 따라 박자를 맞추며 거대한 돌을 옮기고 있었다. 야로와 그의 식구들은 언덕에서 그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반나절 정도면 거대한 돌이 언덕 위에 올라 올 것이다. 부족장 수노의 유해는 이미 언덕에 모셔진 상태였다. 지난 겨울에서 봄 사이, 움집 안에서 곱게 썩어간 수노의 유해는 거의 살점이 다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야로는 직접 아버지의 유골을 수습하여 언덕 위 거북의 머리에 해당되는 곳에 모셔두었다.
 
수노가 죽은 이후, 야로와 마을 원로들은 그가 유언한 거북을 찾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신령한 나무가 있다고 했고, 삼태성을 가장 잘 볼 수 있다고 했다. 근 사흘을 뒤진 끝에 그들은 마침내 신령한 땅을 찾게 되었다. 그곳은 마을에서 반나절이 걸리는 거리에 있는 작은 언덕이었다. 멀리서 보니 거북 한 마리가 고개를 쭉 뻗고 누워 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언덕에 올라가니 가향을 풍기는 나무 하나가 중앙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무를 등지고 북쪽 하늘을 보니 삼태성이 또렷하게 보였다. 수노가 말한 바로 그 땅이었다.
 
반나절이 흐른 후, 마침내 거대한 돌이 언덕 정상에 올라왔다. 야로와 식구들은 기쁜 표정으로 거석을 맞이했다. 여자들이 술과 돼지고기를 내놓아 구슬땀을 흘리는 장정들에게 먹이기 시작했다.
 
한참 후, 술과 음식을 먹은 장정들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이제 장정들은 두 패로 나뉘었다. 치우는 엄정하게 말했다.
 
"자, 한 패는 부족장의 유해가 모셔진 구덩이에 흙을 채우고 그 주변에 굄돌을 놓으세. 나머지 한 패는 큰 돌을 구덩이 쪽으로 옮기도록 하세."
 
치우의 말에 따라 장정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정들의 구릿빛 몸통에서 햇빛이 투명하게 반사되었다. 조금 있으면 자오선의 중앙에 태양이 걸릴 즈음이었다. 태양이 가장 높이 뜬 시각에 맞춰 수노의 유골을 편히 모셔야 했다.
 

#4.먼 후일 귀인이 나타나 이 땅을 편히 다스릴지니
"어이, 어으이~"
 

▲ 수로왕릉 고인돌. 가향을 풍기는 구지봉의 신령스러운 나무를 닮은 듯하다.
무녀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거대한 상석이 흙 위로 올라갔다. 수노의 유골은 이미 땅 속 깊숙한 곳에 묻혔다. 그 구덩이 주변에 네 개의 굄돌을 올린 후, 흙으로 작은 봉분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제 상석이 흙 위로 올라가고, 흙을 털어내면 모든 장례 절차는 마무리되었다.
 
"우리 부족장 수노님의 유해를 모시세~ 가시오, 가시오. 편히 가시오~"

마을 사람들은 영교의 선창에 따라 노래를 부르며 상석을 흙 위로 올렸다. 수노의 유골 주변에는 청동거울과 청동 방울, 조잡한 오리 모양의 토기들과 그가 쓰던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그 모두가 이제 수노와 더불어 누 천 년의 세월 동안 땅 속에서 고이 잠들 것이다.
 
마침내, 거대한 상석이 흙 위에 자리를 잡았다. 치우는 장정들에게 굄돌 주변의 흙을 치우라고 말했다. 어느새 서쪽 하늘에 붉은 놀이 걸려 있었다. 장정들의 몸통에 붉은 색감이 황홀하게 어리었다.
 
야로는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면서 서서히 굳은 결심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마을을 보살피겠습니다. 비록 적은 나이지만 치우 어른과 영교,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잘 할 겁니다. 편히 가십시오. 아버지.'
 
흙이 완전히 치워지고 굄돌과 상석으로 이루어진 무덤이 나타났다. 야로는 그 상석 곁에서 입술을 앙다물며 결기를 다졌다. 이제 마을 사람들의 운명은 그의 손에 달려 있었다. 그의 곁에 구릿빛 얼굴을 한 처녀가 지키고 있었다. 야로의 여자였다. 야로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웃음을 지었고, 여자는 수줍은 미소로 답했다. 놀빛이 그녀의 붉은 입술을 더 붉게 만들었고, 우윳빛 젖가슴이 풍만하게 출렁거렸다.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 동쪽 하늘에서 붉은 반달이 솟아올랐다. 모두들 북쪽 하늘을 쳐다보았다. 삼태성이 밝게 번쩍거렸다. 영교는 마지막 절차를 시작하였다. 청동방울을 하늘 높이 치켜세우고 삼태성을 향해 흔들어댔다.
 
"찰랑, 찰랑."

청동방울이 흔들거리면서 차츰 소리가 고조되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과 야로는 마음 속에 작은 비원을 품기 시작했다. 먼 후일, 이 언덕에 이 땅을 다스릴 천손께서 내려오시기를. 그 천손께서 부족장 수노의 무덤을 알아보시기를….
 

#5.명필 한석봉이 쓴 구지봉석
▲ 조선시대 명필가 한석봉이 '구지봉석' 네 글자의 한자를 쓴 것으로 전해지는 구지봉 고인돌.
한석봉(조선 중기의 서예가:1543~1605)은 육란이 모셔진 언덕 위에 올랐다. 그의 손에는 작은 서책이 하나 들려 있었다. 금관국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었다. 그는 언덕 주변을 이리 저리 둘러보다가 거대한 반석 하나를 발견했다.
 
'아, 이 돌이 바로 그 돌이로구나. 이 기쁨을 어찌 말로 다 하리.'

그는 봇짐에서 지필묵을 꺼내었다. 교교한 빛의 달이 떠올랐다. 칠흑처럼 어두운 언덕에 어느새 은빛이 내리기 시작했다. 석봉은 반석 위에서 오래도록 먹을 갈았다. 묵향이 그의 폐부로 들어왔다. 마침내, 붓을 든 그는 일필휘지로 반석 위에 네 글자를 써내려갔다.

'구지봉석(龜旨峯石)'

멀리 북쪽 하늘에서 삼태성 별빛이 반석과 구지봉석, 한석봉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






김대갑 문화유산 해설사·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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