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 장유 율하동 수남초등학교(교장 임일규)의 한 교실.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이 모여 앉아 열심히 화면을 보고 있다. TV 연예 프로그램의 한 장면이 빔 프로젝터를 통해 나오는 중이었다. 빵을 좋아해 고도 비만에 빠진 젊은 여성의 이야기였다. "뭐야 지금 나한테 빵 던진 거야? 오빠는 내가 오빠가 먹던 밥상 엎으면 참을 수 있어? 오빠는 포기해도 빵은 포기 못해. 오빠랑 헤어지고 빵집 아들하고 살 거야."

▲ 러시아 사할린 귀국 동포 어르신들이 수남초등 한국어 교실에서 한글 공부를 하고 있다.
3년 전부터 매주 금요일 수업 실시
한글·고국 문화 가르치며 적응 유도
명절 세배 등 다양한 프로그램 운영

화면을 지켜보던 어르신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들은 러시아 사할린에서 영구 귀국한 동포들이었다. 수남초등에서 매주 금요일 오후 4시에 열리는 동포 어르신들을 위한 한국어 교실에 참가한 것이었다. 수남초등 한국어 교실은 3년 전 시작됐다. 김해시 도서관정책과가 사할린 귀국동포들이 한국말을 배울 수 있도록 배려한 게 계기였다. 요즘 각 지자체의 도서관정책과에서는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한국어 교실을 연다. 김해는 예산을 사할린 귀국동포를 위해 쓰기로 했다.
 
수남초등 한국어 교실은 어르신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데 그치지 않고 고국의 문화도 가르친다. 이날 수업 중에는 '멘붕', '지방흡입', '요요현상' 등 사전에는 안 나오지만 실생활에서 쓰는 표현도 자주 나왔다. 한국어 교재에 나오지 않는 생생한 단어들이다. 이날 수업에 참가한 김영희(68·여·율하동) 씨는 "학교에서 우리말을 배우고 시청에서는 컴퓨터도 배워 참 좋다"며 "나라에서 생활비도 주고 다른 사람들도 많이 도와줘 잘 생활하고 있다"고 말했다.
 
수업을 열심히 듣고 있던 신영철(77·율하동) 씨와 대화를 나눴다. 그가 일곱살이었던 1943년 일본은 총동원령을 내렸다. 일본군은 신 씨가 살던 전북 남원에서 젊은 사람들을 전선과 탄광으로 강제 징발해갔다. 할아버지와 아버지·큰아버지가 한꺼번에 끌려가자 그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이 때 신 씨의 아버지는 5남매 중 첫째인 신 씨와 바로 밑의 동생을 데려갔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사할린이었다.
 
얼어붙은 땅에서 석탄을 캐는 일은 전쟁과 다름없었다. 새로 결혼한 아버지 밑에서 동생 5명이 더 태어났지만 2명은 곧 죽고 말았다. 1945년 전쟁이 끝났지만 신 씨 가족은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일본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 러시아 사람들이 들어왔다. 이후 수십 년 동안 그는 '신영철'이 아닌 '세르게이'로 살았다.
 
신 씨는 2009년 10월 동포 100명과 함께 영구 귀국해 율하동에 정착했다. 그는 4년 동안 수남초등 한국어 교실에 참여한 덕에 모국어를 비교적 잘 했다. 그는 "사할린에서 험한 세월을 보내며 한국말을 잊어 버렸다. 여기서 배우며 조금씩 다시 생각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 국적을 거부하며 고국 방문을 꿈꿨던 아버지는 사할린 땅에 묻혔다. 김해는 날씨가 따뜻해서 사할린보다 살기 좋다"고 말했다.
 
지난해 10월부터 한국어 교실 수업을 담당하고 있는 최옥주(45·삼문동) 교사는 "우리 말을 전혀 못하는 어르신도 있었다고 들었다. 특정 지역에서 오래 살다보면 기초적인 언어는 익히게 된다. 더 중요한 것은 지역문화의 이해"라고 말했다. 그는 "재미있는 TV프로그램의 동영상이나 잡지 등을 활용해 어르신들이 세태의 흐름을 따라가도록 유도한다"고 말했다.
 
수남초등은 한국어 교실 외에 비빔밥 봉사, 명절 세배 행사, 컴퓨터 교실 등 사할린 귀국동포를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임일규 교장은 "앞으로 우리 학교는 한국어 교실 외에도 여러 가지 활동을 통해 영주 귀국한 사할린 동포 어르신들이 한국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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