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재영(왼쪽) 씨가 쓴 붓글씨 앞에서 박정식 서예가가 배 씨의 어깨를 따뜻하게 감싸 안고 있다.
"마음이 힘들 때가 있지만, 용기를 내야 합니다."
 
다운증후군 청년 배재영(38·대성동) 씨의 말이다. 장애를 가진 자녀를 숨겨 키우려고 하는 부모들도 있겠지만, 그의 부모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배 씨는 초·중·고등학교 모두 일반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부터는 서예가 범지 박정식 씨의 서실에서 붓글씨를 쓰고 있다. 붓글씨를 쓴 지 어느 새 15년이다. 오는 20일 장애인의 날을 앞두고, 장애를 딛고 열심히 살아가는 배 씨를 만났다.

장애인 미술대회 수차례 입상 경력
자신의 마음 글씨에 오롯이 담아내
"부모님이 주신 은혜 언제나 감사"

 
지난 9일 박정식 씨의 서실에는 일찌감치 나와 글씨를 쓰는 사람들이 여럿 보였다. 그 속에 배 씨가 있었다. 그는 맑은 웃음으로 첫 인사를 나누었다. "언론과 인터뷰를 하는 건 처음입니다." 그는 두 손을 양 무릎 위에 단정하게 올리고 앉았다. 15년 간 배 씨의 붓글씨 선생이었던 박 씨는 "재영이는 부모의 바른 교육이 몸에 배어서인지 언제나 예의바르고 반듯하다"고 말했다.
 
배 씨는 서실에서 글씨를 쓰고 장애인복지회관에서 재활훈련을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 서실에 가면 박 씨가 써 준 글씨본을 옆에 놓고 5장 정도의 화선지에 글씨를 쓴다. 그는 글씨본을 먼저 펼쳐놓고 흰 화선지를 잘 펴 문진을 놓았다. 붓을 벼루에 담가 먹물을 찍었다. 붓을 다시 들어 화선지 위로 옮기기까지 먹물 한 방울 떨어뜨리지 않고 손도 떨지 않았다. 붓이 먹물을 얼마나 머금어야 하는지 몸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는 스승의 글씨를 잠시 응시하더니, 다시 시선을 옮겨 천천히 글씨를 써 내려갔다. 한 자를 쓰고 나서는 붓을 놓고 글씨본을 보기 편하게 조금 올려놓고, 화선지도 같은 위치로 올렸다. 그리고 다시 붓을 먹물에 담갔다. 손놀림은 차분했다. 시선도 흔들리지 않았다.
 
배 씨의 글씨 쓰는 모습을 찍기 위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지만, 그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름을 몇 번 불렀지만 오로지 글씨에만 집중했다. '글씨를 쓰는 척, 그러나 얼굴을 카메라 렌즈를 향해 살짝 보여주는' 사진 연출이 도무지 되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다. 옆에서 보던 박 씨는 "재영이는 글씨를 쓸 때 얼마나 집중력이 강한 지 옆에서 불러도 모른다"고 말했다.
 
배 씨는 붓글씨를 쓰는 게 좋다고 말했다. "글씨를 쓰고 있으면 가슴이 시원해져요. 걱정도 없어지고 생각도 없어져요. 답답한 것도 사라져요." 마음 속에 복잡한 생각이 많은 것 같았다. "누나가 세 명 있고, 아들은 저 혼자입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저 때문에 걱정이 많아요. 하지만 저는 부모님이 많이 걱정됩니다." 연로한 부모 걱정을 하는 그는 이 세상의 모든 아들들이 그러하듯 속 깊은 효심을 가진 아들이었다.
 
배 씨의 부모는 아들이 사회에 잘 적응해 살아가기를 바라면서 일반학교에 보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아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계속 무언가를 배우고 익히도록 가르쳤다. 배 씨는 "건강이 안 좋고 머리도 아팠지만, 이제는 괜찮다. 어머니, 아버지는 학교 선생님이셨다. 부모님이 저한테 베풀어주시는 은혜, 잘 알고 있다. 언제나 고맙다"며 웃었다.
 
배 씨는 집에 있을 때는 컴퓨터로 인터넷 검색을 하며 영화도 보고 음악도 듣는다. 요즘은 만화 '명탐정 코난'에 빠져 있단다. "코난은 너무 똑똑하다"는 그는 코난을 시즌 7까지 보았다고 했다. 그는 서실에서 글씨를 쓰다가 가끔 밖으로 나가서 하늘을 본다. 서실 앞 작은 잔디밭을 천천히 걷고 꽃도 보면서 머리를 식히는 것이다. 처음에는 화선지 한 장에 글씨를 쓰는 데 50분이 걸렸지만, 이제는 30여 분밖에 안 걸린다. 자신이 그날 쓰기로 한 목표량은 무슨 일이 있어도 다 써야 집으로 돌아간다.
 
15년 동안 쓴 글씨는 모두 집에 보관돼 있다. 배 씨는 "옛날에 쓴 글씨하고 지금 쓰는 글씨는 다르다"고 말했다. 글씨 솜씨가 늘었다는 이야기일까. 이에 대해 박 씨는 "재영이의 글씨에는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다. 잘 썼다, 못 썼다로 구분할 게 아니다. 마음이 다른 글씨다. 글씨를 썼던 순간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고 말했다. 박 씨의 설명을 듣고서야 배 씨의 말이 이해가 됐다.
 
배 씨는 장애인미술인협회에서 주관하는 장애인미술대회에서 입선 4회, 특선 1회의 수상 경력을 가지고 있다. 한문으로 특선을 해 대전에 수상 하러 갔을 때는 온 가족이 참석했다. "어머니는 '재영아 참 좋다' 하셨어요. 아버지는 '재영이가 더 열심히 글씨를 쓰면 좋겠다'고 하셨죠."
 
배 씨는 장애인의 날을 앞두고 자신의 인터뷰를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다른 장애인들에게 한마디 해달라고 했다. "장애인들은 힘듭니다. 몸도 힘들고 마음도 힘듭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래도 용기를 내야 합니다."

김해뉴스/박현주 기자 ph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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