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떻게 한글을 익혔는지 뚜렷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학교 가기 전 어머니가 자음과 모음을 가르쳤고, 간단한 글자는 자신있게 발음하면서도 받침이 붙은 글자를 무서워하고, '이'를 '10'으로 쓰기도 했다는 어릴 적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 나에게 그런 일들이 있었구나, 고개를 끄덕인다. 읽기는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정보를 받아들이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능력이다. 평생 옆에서 모든 정보를 말로 일러주는 사람을 가질 수는 없는 일이므로 읽기는 매우 중요하다.
 
뉴질랜드의 언어학자이자 문학 연구가인 스티븐 로저 피셔는 '언어의 역사' '쓰기의 역사'에 이어 '읽기의 역사'를 발표함으로써 인류문명의 근간이 된 읽기와 쓰기의 역사 3부작을 완성했다. '읽기의 역사'는 인간이 언제부터 읽기 시작했는지, 읽기는 어떻게 진화해 왔는지, 미래의 읽기는 어떻게 변화해갈 것인지를 전반적으로 다루고 있다.
 
손짓과 몸짓 역시 사람들끼리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지만 언어의 발명은 그 정확성을 더해주었으며, 문자는 소통하는 이야기를 기록하였고, 읽기는 그 기록을 읽음으로써 약속된 기억을 되살려낸다.
 
저자는 읽기와 쓰기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읽기의 전 역사를 통해 읽기는 거의 모두가 말하기였다. 인류는 일찍이 말로 하는 지시나 약속, 계산은 쉽게 분쟁에 말리거나 왜곡되거나 망각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원한 증인'이라고 할 특별한 증인이 필요했으니, 그 증인은 상품과 수량을 틀리지 않고 소리 내어 기억하고, 필요하면 언제라도 심문하여 말로 확인함으로써 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쓰기가 탄생했다."
 
최초의 읽기와 쓰기는 인간의 기억력을 보완하기 위한 보조적 장치였으나 사회와 국가의 발전에 따라 점점 복잡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고, 점차 문학적인 내용을 담은 문헌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고대사회에서는 문자로 기록하는 사람도, 그 기록을 읽을 수 있는 사람도 매우 드물었으므로 이들의 위치 역시 권력과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정보를 안다는 것이 원천적인 힘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은 읽고 쓰는 능력에 힘입어 그들의 사회에서 뚜렷한 엘리트층을 이루어가기도 했다.
 
읽기의 힘을 깨달은 인간사회의 발전은 눈부셨다. 지식을 추구하고 배움을 사랑하는 인간의 본성에 한 번 붙은 불은 쉽게 꺼지지 않았고, 더 많이 알고 싶어 했으며, 한 번 배운 읽기 능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인쇄술의 발명은 더 많은 기록문헌을 생산해냈고, 읽고 쓰는 능력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 역시 늘어났다. 많은 정보를 알게 된 사람들에 의해 종교개혁을 비롯한 사회혁명이 일어났고, 인류문명의 중대한 결단의 중심에는 읽기와 쓰기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민족의 읽기와 쓰기를 생각해 보자. 중국의 한자를 빌어 기록을 하다가 조선에 이르러 우리 문자 한글을 가지게 되었고 세계 최초로 활자 인쇄술을 발명했지만, 인쇄된 문헌은 지배 권력층에게만 배포되었다. 계급사회였던 조선에서는 신분에 따라 글자를 익히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양반 주인 도령을 업어서 서당에 데려다 준 노비가 알고자 하는 본능에 이끌려 담 넘어 글을 배우다가 들키면 천한 것이 감히 글을 배우려 하느냐는 불호령이 떨어지던 시절이 있었다. 읽을 줄 안다는 것은 중요한 정보에 그 만큼 가까이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누구나 정보를 알면 통치하기 힘들기에 정보 접근 자격에 차등을 둔 것이 아니었을까.
 
지금은 소수의 문맹자들 말고는 읽고 쓰는 데에 불편함을 겪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다만 제 스스로 읽지 않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읽기에 사용하는 매체는 종이에서 전자단말기로 옮겨져 가고 있다. 거기에 무엇이 담길 것이며, 계속적으로 읽는 사람과 더 이상 읽지 않는 사람들의 삶은 어떤 차이를 보일지 궁금하다.

▶스티븐 로저 피셔 지음/지영사/487p/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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