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발령지에서의 교육 열정 아낌없이 주셨던 '큰 선생님'
정혜영·김해시여성센터 관장

▲ 정혜영·김해시여성센터 관장
누군가가 '인생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은가'라고 물은 적이 있었다. 스스럼없이 중학교 시절이라고 답했다.
 
김해중앙여자중학교를 다녔던 그 시절, 아무런 어려움도 고민도 없이 정말 재미있게 학교 생활을 했다. 공부도 스스로 즐겁게 했으니 인생에서 가장 찬란했던 시절로 기억할 수밖에 없다. 그 찬란한 기억의 중심에 항상 자리하고 계신 분은 1, 3학년 담임이었던 최숙자 선생님이다.

김해중앙여자중학교 때 최숙자 선생님
30년째 뵙지 못해 "너무 뵙고 싶어요"

 
갓 대학을 졸업하고 첫 발령지에 오셨던 터라 선생님은 엄청난 열정으로 반을 이끄셨다. 매일 아침 일찍 부산에서 출근해 아침자습 문제를 내어놓고 풀이까지 해주셨고, 방과 후에는 집으로 보내지 않고 보충과외(?)까지 해주셨다. 덕분에 우리 반은 1년 동안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선생님은 상으로 과자와 짜장면을 사 주셨다. 1970년대에 짜장면은 지금처럼 흔한 음식은 아니었다.

소풍 때는 또 어떠했는가. 녹음기에 노래 테이프를 틀어놓고 선생님과 함께 춤을 추었다. 스트레스를 풀고 격의 없이 어울리면서 가까워질 수 있었다. 일요일에 선생님이 당직을 서는 날이면 몇몇 학생을 불러 직접 싸온 도시락을 먹이며 대학생활 이야기, 연애담 등을 들려주셨다. 요즘 젊은 아이들이 들으면 웃을 이야기지만, 선생님 덕분에 해운대해수욕장에서 해수욕이란 걸 처음 해 볼 수 있었다. 그때는 수영복을 빌려 입는 것이 다반사였기에 아무런 준비 없이 무작정 선생님만 따라 가서 수박을 먹고 튜브를 타고 놀았던 기억이 난다.

이런 일들이 열정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최 선생님은 정이 많은 분이셨고, 그것을 아낌없이 나눠주셨던 '큰 선생님'이셨다. 코 끝이 시린 날 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졸업식에서 반 학생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 주며 울먹이시던 모습 또한 잊을 수가 없다.

대학 때 인사드린 이후로 30년째 뵙지 못하고 있다. 학교도 그만두고 서울로 이사 가시면서 연락처를 받지 못한 탓이다. 요즘도 친구들이 만나면 선생님을 보고 싶다고,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안타까워한다.
 
"선생님 많이 보고싶습니다. 잘 지내시나요."


개구쟁이를 품어주신 참스승 내 인생의 큰 복으로 자리해
김태호·국회의원

▲ 김태호·국회의원
요즘같이 '선생은 있어도 참스승'은 없다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스승과 제자의 의미는 예전만 못하다. 그래도 내게는 인생에서 큰 복, 참스승이 한 분 계신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이었던 김순현 선생님은 어쩌면 '김태호'를 위해 교사가 된 분 같았다. 늘 좋은 가르침을 주기 위해, 그리고 좋은 방향을 제시해주기 위해 항상 고뇌하는 모습은 무한히 큰 스승의 모습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인 김순현 선생님
지금 생각해도 인자한 교육법 놀라워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초등학교 시절의 추억, 여학생들의 놀이였던 고무줄을 공연히 끊고 달아나는 건 예사. 진흙탕에서 크게 뛰놀며 다른 친구들의 옷을 흠뻑 젖게 만들다 선생님께 혼쭐이 나고 말았다. "태호야, 재밌니?" 나지막이 들려오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어찌나 섬뜩하던지 지금 생각해도 간담이 서늘하다.
 
그때를 떠올려보면 참 개구지게도 놀았다. 울음을 터뜨린 여학생들도 많았는데, 선생님께서는 그 숱한 제보(?)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큰 소리를 낸 적이 없으셨다. 그때 만약 선생님이 큰 소리로 하지 말라고 소리쳤다면, 그 개구쟁이는 움츠러들어 수동적인 사람으로 자랐을지도 모른다.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나니 교육에 대한 중요성을 더욱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이따금씩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면 김순현 선생님의 교육법에 새삼 놀랄 따름이었다.
 
장난기 넘치는 아이를 나무라기보다는 인자한 표정으로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오히려 격려를 해주셨고, 울음을 터뜨리는 여학생들에게는 태호의 잘못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며 달래주셨다. 당시 나이 13세. 어떤 게 바른 모습인지,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판단의 기준이 없을 나이에 만난 김순현 선생님은 그야말로 좋은 사람의 모습, 그리고 바른 사람의 모습을 몸소 보여주며 가르침을 전하신 거다.
 
지금도 인생을 배우는 학생이다. 아직 모르는 것이 많아 스승의 도움이 많이 필요하다. 더욱이 무언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잦을 때는 사사로운 마음이 앞서서는 안 된다. 참스승의 의미가 흐려지는 요즘이지만 마음 속에 참스승의 그림은 더욱 짙어짐을 느끼며 올해도 나는 김순현 선생님께 여쭤본다.
 
"선생님, 가르쳐주십시오!"


대학 입시 실패한 제자에게 인생의 길을 열어주신 은사
장은애·김해분청도자관 실장

▲ 장은애·김해분청도자관 실장
김해여자고등학교 시절 총학생회장을 지냈을 만큼 실패를 모르고 자랐지요. 그런데 그만 대학입시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일이었어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런 판단도 할 수 없었고,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어요. 멍한 상태로 집에 있는데, 3학년 때 담임이셨던 신복일 선생님께서 저에게 전화를 주셨습니다.
 
"은애야, 괘안타. 그기 인생에 다가 아이다." 그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합니다.

김해여고 3학년 때 담임 신복일 선생님
돌아가셨지만 그때 따듯한 위로 생생해


대입 재수 말고 다른 진로에 대한 생각조차 할 수 없었는데, 선생님은 다른 길을 제안해주셨습니다. 부산 동주여전에 전산과가 있었는데 그 과로 가라고 권유하셨답니다. 당시에는 컴퓨터가 귀한 시절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전산과에 가서 컴퓨터를 배워봐라, 미래에 가능성이 있다"고 권해주셨어요.

장학금을 받고 동주여전 전산과에 입학했습니다. 그 학교에 다니길 잘 했는지, 혹은 재수를 했으면 어떻게 달라졌을지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입시에 실패하고 좌절해 있는 제자를 안타까워하면서 특별히 신경을 쓰시고, 전화를 걸어 위로해주시고, 다른 길도 있다고 알려주신 선생님이 지금 생각해도 너무 감사합니다.

선생님은 영어 담당이셨어요. 다른 젊은 선생님들에 비해 솔직히 인기는 많지 않았습니다. 헤어스타일이 착 달라 붙어 있어서, 우리들끼리 선생님이 오늘은 머리 안 감은 것 같다고 하며 웃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지난 2월 14일 김해여고 27기 동기회를 창립했답니다. 초대 동기회장을 맡아 당시 3학년 담임선생님 아홉 분을 찾아봤습니다. 여전히 현직교사로 제자를 기르는 분도 계셨고, 퇴직하신 분, 타지로 가셔서 연락이 끊긴 분, 돌아가신 분도 계셨습니다. 신 선생님은 재작년쯤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30여 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먹고 산다는 핑계로 선생님들을 찾아뵙지 못한 것이 마음 아픕니다.

하지만 김해여고 27기 동기들은 학창 시절 존경했던 선생님들 책상에 꽃도 꽂아두고, 음료수도 가져다 드리던 여고시절 그 때 그 마음 그대로입니다.


어린 제자 개개인의 창의력을 키워주셨지요
박철우·경남은행 대출상담사

▲ 박철우·경남은행 대출상담사
부산 신선초등학교에 입학해 처음 만난 1학년 담임선생님은 그다지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다. 학기 초에 삼촌이 결혼해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가 조카를 보러 학교에 왔다. 그때 체육수업 중이어서 운동장에서 뛰고 있었다. 삼촌을 쳐다보다가 발이 꼬여 넘어졌다. 담임선생님은 삼촌이 보는 앞에서 뺨을 호되게 때렸다. 뺨이 아파서, 마음이 아파서, 너무 창피해서 눈물이 핑 돌았다.

부산 신선초 2학년 담임 차재기 선생님
주입식 교육의 틀을 벗어난 참 교육인

 
2학년이 됐다. 1학년 시절의 악몽이 있어 2학년 선생님은 누가 될지 부담이 컸다. 그 때 만난 2학년 담임은 바로 차재기 선생님이었다. 지금 기억에 당시 50대 중반이었던 것 같다. 그 때는 한 반에 학생들도 많았고 주입식 교육이 판치던 시절이었다. 차 선생님은 반의 아이들과 하나하나씩 면담을 했다. 이상해 보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알게 됐다. 그분의 교육 방법은 다른 선생님들과는 달랐다. 학생들에게 '어떻게 될까'라고 물어보며 의견을 말하게 하셨다. 공부에 관심 없어 보이는 아이들에게서 엉뚱하지만 기발한 창의력을 이끌어내셨다. 꿈에 관한 글을 쓰고 발표하게 하셨다.
 
차 선생님과 함께 한 합창단 활동은 가장 큰 추억으로 남아 있다. 선생님은 음악을 전공했지만 모든 예술에 밝았다. 당시 반마다 남녀 어린이 1명씩 '꾀꼬리' 합창단 단원을 뽑았다. 선생님은 단원으로 뽑아주셨다. 그 전까지는 무엇이라도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잘해보려고 노력한 적도 없었다. 선생님과 함께 공연을 준비하고 사람들 앞에 섰을 때 벅찬 감동을 느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당시에는 한 반의 학생이 65명이었다. 학생들마다 정체성을 발견하고 자신감을 심어주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차 선생님은 부모의 마음으로 가족처럼 학생을 대했기 때문에 하실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분에게서 배운 지식은 기억나지 않지만 삶을 대하는 태도는 아직도 마음에 새겨져 있다. 


아버지처럼 인자한 성품 '내 인생의 나침반'
원종하·인제대학교 교수

▲ 원종하·인제대학교 교수
존경하는 박정룡 선생님.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연락드리지 못해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고2 때 선생님을 처음 뵈었습니다. 6반 담임으로 오셨지요. 교실에 들어오셔서 한 명 한 명 출석을 부르시더니 '소년이노 학난성(少年易老 學難成), 일촌광음 불가경(一寸光陰 不可輕)'으로 시작되는 주자의 권학문 첫 구절을 쓰셨지요.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 짧은 시간이라도 가벼이 여길 수 없어라." 역사 선생님께서 그렇게 하신 모습이 참 멋져 보였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 박정룡 선생님
지금도 추석때면 잊지 않고 챙겨주셔

 
한 번은 다른 고등학교에 심부름을 시키며 자전거를 타고 갔다 오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버스를 피하려다 논두렁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흙이 묻은 교복을 논두렁의 물로 대충 씻고 학교로 갔습니다. 선생님은 "돌아올 시간이 넘었는데 안 와서 걱정하고 있었다"면서 다친 곳은 없느냐며 물으셨지요. 그때는 참 행복했습니다.
 
선생님은 일본으로 파견을 가시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날아오는 항공우편 소인이 찍힌 편지를 기다리며, 또 편지로 소식을 전하는 그 시간들이 즐거웠습니다. 대학 생활에 적응해 가던 어느 날 편지는 끊겼고, 군 입대를 앞둔 저는 선생님께 꼭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선생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경로를 통해 알아본 결과 귀국하셔서 대구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저녁 시간에 학교로 찾아가 뵈었습니다. 저를 환대해주시던 그날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
 
몇 년 전부터는 추석 때가 되면 선생님께서는 포도를 보내주셨습니다. "버스로 보냈으니 찾아가라"며 아버지처럼 자상하게 말씀하시던 그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합니다. 선생님을 통해 가르치는 한 사람의 진실된 사랑이 내일을 향해 나아가는 열정의 사람에게는 중요한 나침반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가정에 늘 평안과 행복이 넘치길 바라며 강녕하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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