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박점숙과 '프로아뜰리에'

미술대학을 갓 졸업한 앳된 처녀가 오래된 목조건물 2층에서 초등학생 6명을 데리고 미술학원을 시작했다. 함께 그림을 그리고, 함께 놀다보면 아래층 사진관 주인이 긴 막대기로 천정을 툭툭 쳤다. 그러면 2층 바닥으로 소리가 전해져왔다. "얘들아, 조용히 해!" 잠시 그렇게 웃음을 죽이고 있다가 또 그림을 그리고 함께 웃었다. 학생들과 학부모들로부터 '예쁜 미술선생님' 소리를 들었던 박점숙(51) 씨는 서양화가가 됐다. 그림을 그리면서 어린이집과 미술학원을 운영하는 그의 화실을 찾아가보았다.

▲ 박점숙이 그림을 그리는 공간. 이젤을 5개 정도 펼쳐놓고 작업을 할 만큼 열정이 넘친다.

활천로 74번길 22. 김해시선거관리위원회 바로 옆에 청록학원이 있고 그 맞은편에 청록어린이집이 있다. 박점숙의 화실은 청록학원 1층에 있다. 화실 이름은 '프로 아뜰리에'.
화실은 3개 공간으로 나뉘어 있다. 출입문 쪽은 그림을 그리는 공간, 안쪽은 그림액자가 빼곡하게 세워져 있는 공간, 양쪽 공간 앞은 그림을 배우러 오는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공간이다. 그리 넓지는 않은 공간이지만, 적절하게 잘 나뉘어 있었다. 산뜻한 배치였고, 금방 청소를 끝낸 것처럼 깨끗했다.
그림이 있는 안쪽 공간은 그림을 볼 수 있도록 액자를 세워놓았는데, 그림액자 뒤에는 몇 개의 액자가 더 세워져 있었다. 뒤의 그림을 보고 싶으면 꺼내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화실 안에는 100여 개의 그림이 있었다. 그림은 꽃, 시골길 풍경 등 자연물을 그린 게 눈에 많이 뜨였다. 꽃을 소재로 한 액자들이 연이어 놓여 있는 걸 보고 있자니, 마치 화원에 들어와 앉아 있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실내에는 전시조명과 빔 프로젝트가 설치돼 있었고, 잔잔한 음악도 흐르고 있었다. 취재를 왔다기 보다, 마치 작가의 오픈스튜디오에 초대된 기분이었다.

박점숙이라는 이름 때문에 얼굴 어딘가에 점이 있을 줄 알았다는 기자의 말에 그는 "무릎에 점이 있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부터 나누고 나니 이야기는 술술 풀려나왔다.
그는 김해에서 태어나 봉황초등, 김해여중, 김해여고를 졸업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가락문화제 그림대회에 나가 참방을 했어요. 당시에는 김해극장이나, 금보극장에서 상을 나눠줬어요. 극장에 가서 상을 받으면서 '내가 그림을 잘 그리나'라는 착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계속 그림을 그렸죠." 착각이라니? "어머니는 손으로 하는 건 뭐든지 잘 만드셨어요. 83세에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전에도 종이로 연꽃을 만들었을 정도였으니까요. 어머니 손재주를 자식들이 물려받은 것 같아요. 오빠는 상업미술을 하고, 언니는 미용업을 하고 있어요." 그럼 그렇지, 역시 재주 내림이 있었다. 어린소녀에게 주어진 상은 필연이었던 것이다.

▲ 박점숙의 화실 안쪽 공간은 작품들로 가득하다. 작가의 오픈 스튜디오를 방문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공간이다. 김병찬 기자 kbc@

"제 성격이 소심한 A형이에요." 유쾌한 말투에 활달한 몸놀림을 보이는 그가 소심한 성격이라니 믿기 힘들었다. "혼자서 조용히 그림을 그렸어요. 김해여고 시절, 그림 그렸던 몇몇 친구들이 김해지역 고교 미술 동아리였던 '미우회'에서 활동할 때도 저는 혼자 조용히…. 친구들이 '그때 그 아이가 너였냐?'라고 할 정도였죠." 조용한 소녀였지만 김해여고 미술부 시절의 추억은 재미있고 감미로웠다. "밤늦게까지 미술실에 남아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경비 아저씨가 집에 가라고 호루라기를 불면서 복도를 돌아다녔죠. 그럼 집에 가는 척 나왔다가 학교 뒷문을 통해  다시 미술실에 들어가곤 했어요. 친구들과 선생님과 함께 상동으로 스케치를 갔던 기억도 나요. 버스차창 안으로 아카시아 가지가 밀려들어왔는데, 그때 그 향기가 지금도 생생해요. 이젤을 들고 코스모스가 피어있던 시골길을 타박타박 걸어다니던 기억도 납니다." 수줍고 소심한 단발머리 여고생이 눈앞에 떠오르는 예쁜 추억이었다.
"저는 1남 5녀 중 막내로 태어났어요. 아들도 아니고, 딸인데다 막내라서 거의 방치(?) 되다시피 자란 것 같아요." 그래서 그는 오히려 자유로웠는지도 모른다. "저에게 미술적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셨겠지만, 아버지께 미술을 전공하겠다고 하니까 그러라고 하셨어요. 화실(미술학원)을 내겠다고 아버지께 보고를 드렸지만, 그게 뭐하는 곳인지는 잘 모르셨을 거예요." 그게 뭔지 모르면 또 어떤가. 아버지는 막내딸을 그저 믿어주지 않으셨을까.

대학을 졸업할 즈음, 그는 동상동에 미술학원을 냈다. "중국식당인 경화춘 옆에 일본식 목조건물이 있었는데, 2층을 세내어 미술학원을 열었어요. 초등학생 6명이 저의 첫 제자였죠. 저도 학생이었으니 부산의 학교를 다녀와 오후에 아이들을 가르쳤어요. 졸업을 한 뒤 24세 때, 오전부터 가르칠 수 있게 돼 유치부 4명을 더 받았지요. 점심때는 한 어머니가 찬합에 밥을 담아 배달해주셨어요. 아이들과 함께 그 밥을 나눠먹고, 그림을 그렸어요." 그 시절로 돌아간 듯 박점숙의 얼굴이 추억에 젖었다.
"토요일에는 아이들과 물병 하나, 스케치북 한 권씩 들고 만장대까지 뛰어올라갔어요. 만장대에서 김해를 내려다보면서 스케치를 하고, 전 그 스케치북을 어머니께 보여드리라고 시키곤 했죠. 어머니들이 그런 수업방식을 신선해 하고 굉장히 좋아하셨어요. 아이들도 점점 늘어나더군요. '젊고 예쁜 여선생님'으로 알려지면서 인기가 좀 있었지요. 그때 학원이 10평 남짓 했는데, 아이들이 늘어나 비좁다는 느낌이 들던 차에 주인이 그만 나가줬으면 하더라구요." 그즈음 그는 부원동 금강병원 맞은편 건물의 2층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걸어서 출퇴근을 하던 때였는데, 오갈 때마다 그 2층 공간에 주문을 걸었죠. '넌 내꺼다!' 하면서 2층에 올라가서 문도 열어보고, 벽도 쓰다듬어보면서 매일 들락거렸죠. 그리고 정말 그곳에 세를 얻었어요. 48평쯤 되는 공간이었어요. 유치부, 초등학생, 중학생까지 학생들이 150여 명은 됐어요." 당시의 제자 중에는 서울대학교 미대에 진학한 학생도 있다고 한다.

"아이들을 좋아해서, 부산여자대학교 보육학과와 성덕대학 유아교육학과를 다시 졸업했어요. 그리고 미술학원 하면서 모아둔 돈으로 2003년에 청록어린이집을 열었죠. 다른 선생님들과 수업을 나누면서 시간 여유가 생겼고, 그래서 제 그림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었어요. 아이들 그림 지도하느라 제 그림을 그릴 시간이 없었어요. 일하는 재미도 컸지만, 내 그림을 못 그리고 일만 하다가는 병이 날 것 같더라구요. 2005년에는 청록학원을 냈어요. 학원 안에 이 화실공간을 마련하고 나니 그림도 더 잘 그려지고, 개인전도 열고, 너무 행복해요. 이 학원에서는 그림도 배우고, 피아노도 배우고, 영어회화도 배울 수 있어요. 주부들을 위한 그림교실도 있어요. 이 학원을 문화예술교육센터로 키우는 게 제 꿈이에요."

유아교육, 미술교육을 하면서 서양화가로 활동하는 그를 향해 친구들은 가끔 이런 질문을 던진다고 한다. "너의 정체성은 뭐냐?" 그리고 또 묻는다고 한다. "그렇게 일을 많이 하면 피곤하지 않아?" 김해야학 교감을 비롯한 봉사활동 경력까지 치면 정말 하는 일이 많기는 많다. 그 와중에 개인전을 열고, 화가 친구들과 함께 스케치 여행도 꾸준히 하고 있다. "바쁘기는 하지만 즐거워하면서 하다 보니 일도 그림도 다 되더군요."

그의 열정은 이젤을 동시에 5개 정도 펼쳐놓고 그림을 그리는 습관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어떻게 한꺼번에 그렇게 그리느냐고 묻는 질문에 "이쪽 캔버스에 칠한 물감이 마르는 사이, 그 옆의 캔버스에 가서 그림을 그린다"는 답이 돌아왔다. 충분히 그럴 수 있어 보였다.
그는 할 일이 많아서 결혼도 빨리 한 사람이다. "하고 싶은 일이 많고, 할 일이 많은 사람은 빨리 결혼해서 아이 낳고 가정을 안정시켜야 해요. 그러면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어요."

에너지가 넘치는 그는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전 나이가 들어도 일을 많이 하고 있을 거예요. 여전히 스케치여행을 다니면서 자연을 눈에 담고 그 감동을 화폭에 옮기고 있을 겁니다. 헤어스타일은 쇼트커트로 하고, 빨간 스커트 입고, 빨간 립스틱 바르고…. 자연스럽고, 편안하고 강렬한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화가이면서 동시에 교육자이다 보니 지켜보는 눈이 많아 조심스러울 때가 많지요. 나이가 더 들면 눈치 안 보고 나의 열정을 한 번 쯤은 '확' 보여주고 싶어요." 세월이 훌쩍 지나 그가 자신의 열정을 더 자유롭게 펼쳐 보일 때, 기자도 다시 한 번 취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화가이면서 미술교육가·유아교육가로
바쁜 일상에 아름다운 색칠을 하는 그
지인들이 묻는다 "정체성이 뭐지?"라고
그림 그리고 가르치고 액자로 가득찬
 3개 공간 화실에서 그는 늘 "그림의 꿈"

≫ 박점숙
서양화가. 한국미협·김해미협·부산수채화협회·부산야수회· 한국 중국 수채화협회 회원, 부산수채화협회운영위원, 부산비엔날레운영위원, 청록어린이집·청록학원 원장. 개인전 4회, 창원도립미술관 경남미술사 정립전시회 초대전 및 단체전 80여 회. 나혜석미술대전 특선·대한민국 미술대상전 최우수 외 공모전 다수 입상.
김해뉴스 /박현주 기자 ph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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