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선비들은 시·서·화를 즐겼다. 선비들의 문인화는 추사 김정희를 정점으로,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문인화와 전문 화가에 의한 문인화로 나뉘어졌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전업작가들에 의한 그림이 등장한다. 시·서·화가 함께 어우러지는 것이 아니라, 그림만 남은 것이다. 김해 출신의 구한말 관리이며 유학자였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는 조선이 붕괴하고 일본의 식민지 침탈이 본격화되던 시기였다. 이 시기를 살았던 조선의 사대부들은 선비로서, 지식인으로서, 또 지배계층으로서 자신의 지위와 역할에 대해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예강 안언호(禮岡 安彦浩 1853~1943)는 19세기 말에 태어나 20세기 초까지 살았던 김해의 선비였고 향촌 지식인이었다. 예강은 성재
목민관. 백성을 다스려 기르는 벼슬아치라는 뜻으로, 고을의 원(員)이나 수령 등의 외직 문관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한 지역을 다스리는 이가 얼마나 중요한 지는 두 말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성재 허전(1797~1886)은 3년여 김해도호부사를 제수받아 김해에 머물렀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지역 인재를 양성하며 선정을 펼쳤다. 성재는 김해사람은 아니지만,
대의를 위한다지만, 소신과 신념을 평생 일관되게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일제가 온 나라를 핍박하던 엄혹한 시절이었다면. 배치문 의사는 그런 삶을 산 분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호 '인물열전'에서는 배치문 연구자인 권도균씨를 통해 배 의사의 사상과 철학을 살펴본다. 권씨는 전남 목포의 시민운동단체인 목포KYC(한국청년연합 목포지부)의 상근자(
온 마음을 다해 조국을 위해 살다 간 순국선열의 삶은 언제나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그러나 삶의 궤적이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다.배치문 의사(1890~1942)가 그렇다. 3·1절을 맞아 김해의 의인들을 소개하는 도중 는 배치문 의사를 만났다. 매년 3·
3·1운동 93주년 … 일제의 폭압과 지배에 항거한 김해의 독립만세운동과 의인들1910년 8월 29일, 일본이 우리나라의 자주 통치권을 강제로 빼앗았다. 일본은 조선을 강점한 뒤 군사력을 배경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 각 분야에서 폭력적인 억압과 수탈을 자행하는 무단통치를 실시했다. 1910년대
조선을 대표하는 정신적 기풍을 말할 때, 우리는 조선의 선비를 떠올린다. 선비는 조정에서 국정을 운영하는 정치세력이 아니다. 그렇다고 현실을 떠나 은거만 했던 이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학문을 바탕으로 현실을 비판하되, 속세의 허명에 사로잡혀 정치권에 이용당하지 않고 자신의 학문과 철학을 세상 속에서 펼친 이가 참된 선비라 할 것이다. 남명 조식(南冥 曺植
시(詩)·서(書)·화(畵)는 문인예술의 중심이다. 시서화가 담긴 문인화는 동양미학의 원류이다. 문인화는 11세기 말경 중국 송나라에서 처음 시작됐다. 이후 명나라 말기의 문인이자 서화가인 동기창에 의해 양식이 정립됐다. 우리나라에는 청나라 때 유입됐으며, 추사 김정희를 통해 정착됐다. 한국 문인화는 동양회화의 큰 흐름과 함께하면서도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세계무대에 오른 대한민국 선수들의 경기 성적에 온 국민이 기대를 걸었고, "고국에 계신 국민 여러분 기뻐해주십시오!"라는 아나운서의 말 한마디에 가슴이 뭉클해지는 시대가 있었다. 대한민국체육의 역사는 우리나라의 역사이며, 세계 속의 한국으로 우뚝 서는 성장의 기록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체육이 발전할 수 있도록 많
다섯줄의 선 위에서 높은음자리표로 시작되는 악보. 노래를 하거나 연주를 하기 위한 기본적인 기호들이 기록된 것이다. '다섯줄'이나 '높은음자리표'라는 우리말이 없으면, 'staff'와 'G clef'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 우리가 너무 편안하게 사용하고 있는 '높은 음자리표'라는 말을 생각해 낸 사람이 작곡가 금수현 선생(1919. 7
한글백일장은 대한민국 땅 어느 곳에서든 열리고 있지만, 김해의 한글백일장은 특별하다. 올해로 15회를 맞게 될 이 백일장은 김해문화원에서 한뫼 이윤재 선생을 기리며 열고 있는 행사이다. 한뫼 이윤재(1888. 12.24.~1943. 12.8.)는 한글을 지키기 위해 갖은 고초를 겪었던 한글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고, 민족의 얼을 지켜가는 후세대를 길렀던 교육자
강담운이 언제 태어났는지, 언제 이 세상을 떠났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그녀가 사랑했던 차산 배전(1843~1899. 조선말에 활동한 개화 사상가이자 김해 출신 문인화가)의 기록과 강담운의 시를 통해, 두 사람이 만난 시기나 강담운의 나이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차산 배전을 연구하다가 강담운의 시집 '지재당고'(1877년 간행)를 알게 된 이성
신문에 시사만평이나 시사만화가 없다면 그야말로 '팥소 없는 팥빵'이 아닐까. 풍자와 해학이 넘치는 시사만화는 그 당시의 사회적 흐름을 대변해 준다. 우리나라의 역대 시사만화로는 '고바우 영감'(김성환), '두꺼비'(안의섭), '왈순 아지매'(정운경), '나대로 선생'(이홍우), '한겨레 그림판'(박재동), '피라미' '어리벙'(
박해수 씨는 1926년 김해군 가락면 식만리(가락면은 1989년 부산 강서구에 편입됨)에서 태어났다. 식만(食滿)은 '밥 만개'를 뜻하는 말로, 땅이 기름져 밥걱정이 없는 갯가라고 해서 붙여진 마을이름이었다. 박 씨는 식만리 소작농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열여덟에 부친을 여의고 소년가장이 된 그는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여덟 식구의 생계를 위해 일을 했다
이번호 '인물열전'은 지난호 대눌 노상익의 아우인 소눌 노상직(小訥 盧相稷 1855~1931)의 삶을 다룬다. 소눌은 일본이 조선을 강제병합한 어려운 시대에 김해, 밀양, 창원, 창녕 등지에서 조선의 선비로서 지조와 양심을 지키며, 수많은 후학들을 길러냈던 분이다. 소눌은 영남유학자 중에서도 성호 이익의 학통을 따르는 실학자이며, 당대의 석학이었던 성재
대눌 노상익은 김해 한림면 금곡리에서 태어났다.(금곡리는 생림면에 속해 있다가 1983년에 한림면에 편입되었다) 대눌이 태어난 금곡리에는 망국의 한을 품은 채 말년을 보낸 '천산재'의 흔적이 남아 있고, 묘역이 있는 선산이 있다. 광주노씨의 4백년 세거지인 '본금곡마을'(금곡리의 중심이라는 의미)의 입구에는 오래된 나무들이 버티고 서 있다. 대눌의
김해시 봉황동 25-9번지에 김해여성복지회관이 있다. 김해의 여성들이 힘을 모아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민립(民立) 여성회관이며, 전국에서 유일하게 여성이 지은 여성회관이다. 그 중심에는 고 변진수(1925~2006) 선생이 있다. 변진수 선생은 김해와 여성을 위해 일생을 헌신과 봉사로 살다 가신 분이다. 김해는 물론이고 우리나라 여성계의 정신적 지주였던 선
"한 방 가득 둘러서 있던 책꽂이와, 그 안에 가득한 책들, 낡은 책에서 배어 나오는 향긋한 종이 냄새, 책상 위의 원고지. 그 속에서 조용히 앉아 무언가를 읽고, 쓰고 계시던 할아버지, 할아버지…." 허웅 선생의 맏손녀 허누리 씨가 추모문집에 남긴 글 중 한 대목이다. 이번 호에서는 한글 사랑과 학문 연구로 일관했던 허웅 선
'세종대왕께서 지으신 한글을 한힌샘 주시경이 국어학의 주춧돌을 놓았고, 외솔 최현배가 집을 지었으며, 눈뫼 허웅은 그 집을 말끔히 보수하는 구실을 했다.' 국어학자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평생을 '한글사랑 나라사랑'으로 일관한 삶을 살았던 허웅(1918~2004) 선생은 김해 사람이다. 허웅 선생은 알지만, 김해사람인 줄은 몰랐다는 사람들이 의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