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민주 김해문인협회 회장·인제대 행정실장
실존주의 철학에서 인간의 실존은 본질에 앞서는 것으로 본다. 실존에 있어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로서가 아니라 개인이 처해있는 현실 속에서 개별적 '존재'로 이해된다. 개별적 존재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면 하나를 택하여 불안으로 삶을 살아간다. 살아가는 일이 시시포스 신화처럼 바위를 산으로 밀어 올리고, 올리고 나면 굴러 내려오고, 또 밀어 올리고 하는 반복된 행위의 연속이다.
 
나는 오늘도 마찬가지로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기 위해 자동차의 문을 여는데 앞바퀴 밑에 분홍색 지갑이 떨어져 있다. 주워서 내용물을 살펴보니 몇 만 원의 돈과 학생증, 그리고 예쁜 인물 사진 몇 장이 들어있다. 사무실에 와서 주인을 찾아주기 위해 연락을 했다. 학교 마치고 저녁 시간에 찾으러 오겠단다. 퇴근하여 저녁을 먹고 <김해뉴스> 신문을 보는 중에 초인종이 울렸다.
 
현관문을 여니 교복을 단정하게 입은 여고생이 작은 케이크를 들고 서 있다. 지갑을 찾으러 온 학생이라 지갑을 건네주니 케이크를 전하면서 감사하다고 한다. 케이크까지는 예상치 못한 일로 한 주를 즐겁게 보냈다. 누구 집 딸인지 모르지만, 감사함을 아는 가정교육이 잘된 딸의 부모가 훌륭해 보였다.
 
주말이 되어 장애인복지관이 있는 분성산을 아들과 올랐다. 아들은 순박한 대학생으로 공부에는 큰 흥미가 없지만, 성품이 나름 괜찮아 목욕탕으로 산으로 종종 같이 다닌다.
 
상쾌한 기분으로 내려와 복지관 앞을 지나는데 아들이 "아부지! 저기 지갑" 한다. 검은색 두툼한 지갑이 주차장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다. 주워서 내용물을 살펴보니 국립대학 기계공학부 학생증과 신용카드 그리고 몇 십 만원이나 되는 현금이 들어있다. 아들이 "아부지! 이 지갑 현금만 빼고 우체통에 넣어버립시더"라고 한다. 나는 도덕적 책임감에서 "안 돼! 장애인복지관에 봉사하러 왔다가 지갑을 흘려버린 착한 대학생일 수도 있잖아. 주인 찾아주자"고 하니 아들은 잠시 생각하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집에 와 지갑의 주인에게 전화를 했다. 그 학생은 경주에 놀러 와 있다고 하면서 저녁에 찾으러 오겠다고 한다. 저녁을 먹고 텔레비전 앞에 앉아 학생을 기다리는데 연락이 없다. 피곤한 몸으로 늦게까지 잠도 못 자고 졸고 있는 마당에 자정이 다 되어서야 전화가 왔다. 아파트 슈퍼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지갑을 갖다 달라고 한다. 나는 지난번의 그 여학생을 생각하고 아들에게 살아있는 교육의 현장이 될 것 같아 자는 아들을 깨워 지갑을 들고 슈퍼 앞으로 갔다.
 
슈퍼 앞에는 검은색 승용차가 정차해 있었고 창이 열린 조수석에서는 새파랗게 젊은 여자가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차 옆에서 남자가 거만하게 나를 바라보면서 "지갑 주세요!" 한다. 지갑을 내밀자 그 남자는 매가 쥐를 낚아채듯 지갑을 채어 휙 돌아서 운전석으로 가 문을 꽝 닫고는 찬바람을 일으키고 가버린다.
 
아들은 졸리운 눈으로 이 광경을 보고 "아부지! 제가 뭐라 했슴니꺼, 현금만 빼고 우체통에 넣어버리자 안 했슴니꺼" 한다. 나는 뭐라 말할 수 없는 멍한 상태에서 "그래도 너는 저러지 마라!"하고 씁쓸히 발길을 돌렸다. 누구 집 아들인지 모르지만, 감사함을 모르는 가정교육이 잘못된 아들의 부모가 불쌍해 보였다.
 
요즈음 사회변화에 빨리 적응하기 위해 서두르다가 물건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많다. 스마트 폰이 일례다. 스마트 폰을 주운 많은 사람들은 주인을 찾아주지 않고 불법으로 거래한다고 한다. 이게 바람직할까? 주운 물건의 주인을 찾아 주었을 때 남자 대학생과 같은 행동을 보였다면 찾아 줄 마음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찾아주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우리는 개별적 존재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타인과 무관한 존재는 아니다. 나와 타인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상호적 존재이다. 나 자신은 남에 대하여 주체이지만, 나도 남에게는 타인이다. 자신이 잃어버린 경우를 생각해서라도 주인을 찾아주는 것이 인간의 참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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