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대를 내려오다 뒤를 돌아보니 눈부신 벚꽃이 푸른 하늘에 가득하다. 하얗게 흩날리는 꽃잎이 봄날의 전성을 뽐내며 꽃대궐을 이루고 있다. 그렇다. 여기는 가야의 첫 임금으로 가야왕국의 전성을 구가하던 수로왕의 대궐이 있었던 곳이다. 수로왕이 김해에 도읍을 정하고, 가야 여러 나라 중에서도 제일 큰 나라, 그러니까 '큰 가라'를 뜻하는 '대가락(大駕洛)'으로 불렸던 가야왕국의 중심이 여기 있었다.
 
지난주에 들여다 본 패총단면전시관을 나와 북쪽에 있는 가락왕궁의 표식을 찾아간다. 전시관이 자리한 고개가 이 동네 이름이 되었던 회현(會峴)이다. 만날 회(會), 고개 현(峴)이니, 북쪽의 회현동과 남쪽의 봉황동이 여기서 만난다. 하지만 예전에는 '여시고개', 그러니까 '여우고개'로도 불렸단다. 아니 '여우고개'가 더 오래되었을 것 같다. 원래 가야의 '여의낭자'를 기념하던 '여의고개'가 '여우고개'로 되어, 여우 호(狐)에, 고개 현(峴)이 부쳐졌고, 다시 '호'에 소유격 'ㅣ'가 붙어, '회'가 되었으며, 이후 좌우 양쪽의 길이 여기서 만나는 지형에도 어울리는 만날 회(會)가 쓰이게 되었다. 꼭 그렇게 단언할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병태 선생의 '김해지리지도'도 그렇게 전하고, 그중 합리적이란 생각이 들어 나는 그렇게 믿는다.
 
▲ 김해봉황유적.
회현에서 북쪽으로 내려가면서 오른쪽으로 길게 뻗은 회현리패총의 언덕을 바라보면, 동쪽 끝에 키가 20m 이상이나 되어 보이는 200살의 거목이 세월을 얘기하고, 그 앞에는 뚜껑돌이 비스듬히 흘러내리고 있는 2천500년 전의 고인돌이 건재하다. 관심이 있다면 문화재과에 허락을 얻어 철선 안에 있는 뚜껑돌 만져보기를 권하고 싶다. 뚜껑돌 위에 돌로 쪼고 갈아내, 동그랗게 패인 부드러운 자국 여럿을 손으로 느낄 수 있다. 고고인류학자들이 컵(Cup)마크, 또는 성혈(性穴)이라 부르는 청동기시대인의 손길이다. 수로왕 등장 이전에 있었던 아홉 촌장의 구간사회인들이 많은 생선과 조개 잡히기와 아이들과 가축의 다산을 빌었던 주술과 축제의 흔적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러니까 성혈은 생산하는 여성 자체를 상징했던 것이었다.
 
▲ 회현동주민센터 인근 은행나무와 '가락국 시조 왕궁터' 비.
가을이면 빨간 석류가 담장을 넘는 파란 담장 집을 지나, 포장도로를 건너 맞은편에 보이는 좁은 길로 들어선다. 다닥다닥 붙은 집 몇 채를 지나면, 길이 넓어지면서 작은 교차로가 나온다. 오른쪽으로 가면 회현동주민센터가 되지만, 우선은 왼쪽 앞에 보이는 큰 은행나무로 간다. 횡하게 비워진 공터 한 가운데 오래된 은행나무가 서 있고, 바로 앞에 '가락국시조왕궁허(駕洛國始祖王宮墟)'란 글자를 깊고 두툼하게 새긴 비석이 있다. '가락국 시조의 왕궁 터' 란 뜻으로, 뒷면의 명문에서 331년 전인 조선 숙종 6년, 1680년에 축대를 만들어 비를 세우고 은행나무를 심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비석도 이미 330여 년이나 되었지만, 수로왕 때부터 1천50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뒤의 주장인 셈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수로왕이 돌아가시고, 왕궁 동북쪽에 능을 만들었다'니까, 조선시대 사람들이 수로왕릉 남서쪽에 해당하는 이곳을 왕궁 터로 여긴 것일 테지만, 확증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던 지난 2003년 11월,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확증이 발견되었다. 왕궁을 둘러싸고 있던 성벽의 일부가 발견되었던 것이다. 봉황동에 흙을 다져 만든 토성이라 '봉황토성'으로 명명되었다. 비석을
등지고 왼쪽으로 비스듬히 가면, 도로 가 화단에 그 발견을 알리는 간판이 있다. 발굴된 봉황토성 사진을 스테인리스 판에 컬러로 인쇄하고 설명문을 붙였다. 소방도로확장공사에 앞서 실시된 발굴조사에서 가야의 성(城)이 처음 발견되었고, 성벽에 포함된 가야토기로 5세기경의 토성으로 추정되었다. 양쪽 아래에서 위로 너비를 줄여가며 다듬은 돌을 계단식으로 쌓아올려 기초를 만들고, 그 가운데에 흙을 부어가며 켜켜로 다져 쌓아 올린 판축(板築)의 구조였다. 성벽의 너비는 아랫부분이 14m, 윗부분이 7m 정도였고, 가운데에 높이 2.4m 정도의 토성이 남아 있었다. 성벽 안쪽에는 셀 수없이 많은 움집형 집자리와 창고형 건물지가 서로 중복되어 발디딜 틈도 없었고, 성벽과 비슷한 시기의 가야토기들이 출토되었다. 짧은 기간에 짓고 부수고, 다시 세우기를 거듭했던 가야왕궁 안의 분주하고 심한 변화의 단면을 보여주었다.
 






원래 고고학자들은 발굴조사의 결과를 특정의 역사기록에 직결시켜 단정하기를 꺼려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봉황토성을 가락왕궁의 성벽으로 추정하는 데는 별로 망설임이 없었던 것 같다.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수로왕이 도읍을 정하면서 길이 1천500보의 나성(羅城)을 돌리고, 궁궐·관청·무기고·창고 등이 있는 신궁(新宮)을 지었다 하였다. 물론 봉황토성 자체가 수로왕 이후 350년이나 지난 유적이긴 하지만, 가야왕궁의 위치를 확정하기에는 충분한 자료가 되었다. 2009년, 김해시는 장기계획의 왕궁복원사업을 시작했으나, 1차년도 49억 원 정도의 사업이 진행되었을 뿐 예산문제로 중단되었다. 은행나무 주변이 횡한 공터로 남게 된 것도 들어차 있었던 주택들을 매입해 철거했기 때문이다. 어서 빨리 가야왕궁의 실체가 가시화되는 복원사업이 진행되기를 기대해 본다.
 
▲ 회현동주민자치센터 전경.
발길을 옮겨 가야문화가 지역의 자랑도 되고 발전의 장애도 된다는 회현동주민센터를 찾는다. 문화재로 인한 개발제한과 도심의 공동화로 인구가 줄어간다는 회현동은 과거와 현재의 조화라는 우리 시의 과제를 온몸으로 실험하고 있는 첨병이다. 1958년 10월에 김해교육청으로 세워졌던 2층 청사는 이미 50년이 넘었다. 일하는 분들과 찾는 민원인들이야 좁은 공간의 낡은 건물이 불편하겠지만, 밝은 회색으로 단장하고, 큰 나무 그늘이 앞마당에 내리는 청사의 오밀조밀함이 오히려 정겹다. 노순덕 동장 이하 9명의 직원이 4천83세대 9천514명의 주민을 돌보고 있다.
 
주민센터를 지나면 왁자지껄한 시장 한 복판이다. 여기저기 벌어진 좌판이며, 내 물건 사라 외치는 소리에, 물건을 산더미처럼 실은 포터도 가고, 배달 오토바이가 분주한 그 사이를 꼬부랑 할매가 지난다. 2와 7이 든 5일마다 열리는 장날이면 이 소란은 극에 달해 차라리 정겨움으로 바뀐다. 파고 사는 이들이야 필사적이겠지만, 우리 같은 구경꾼들의 입가에는 어느새 미소가 번진다. 대한제국 때부터 번창한 김해장은 인근에서는 부산의 구포장과 함께 가장 컸고, 필자가 처음 봤던 17, 8년 전만 해도 조선시대로 타임슬립한 느낌이었다.
 
전국의 5일장으로 배추, 무, 수산물이 소개되고 있지만, 어르신들 말씀으로는 가축시장으로도 유명해, 장날이면 동물원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한다. 지금의 범한상가 자리가 가축시장이었고, 그래서 선지해장국, 삼계탕, 양곱창 집들이 유명하고, 제일동물, 제일가축, 중앙가축 등 유난히 많이 보이는 동물병원은 축협이 이웃해 있어 그렇기도 하지만, 가축시장이 서던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동상동 쪽의 상설시장도 좋지만, 장 설 때 마다 조금씩 다른 풍경을 연출하는 5일장도 재미있다. 인제대의 동료교수 중에는 장날이라고, 파장 전에 가야한다고 한창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이도 있다. 어릴 적 고향의 향수를 지금 사는 김해에서 음미하고픈 모양이다.
 
이 시장거리는 근현대 김해역사의 현장이기도 했다. 1919년 김해의 삼일만세운동이 바로 여기서 일어났다. 세브란스의전 학생이었던 배동석은 3월 1일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학생대표로 만세를 부른 뒤, 독립선언문을 가지고 내려와 임학찬, 배덕수 등과 함께, 3월 30일 밤 10시 읍내 중앙거리에서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가락면 대사리의 허병은 최덕관(대사), 최계우(활천), 조병중(삼방), 김석암(부원), 송세탁(진례), 송세희(진례) 등과 함께, 4월 2일 김해장날에 장꾼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오후 4시경에 시장의 십자로에서 태극기를 나눠주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김해의 만세시위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간과 장소가 이곳의 장날이었다. 지금 앞에서 까만 비닐봉지를 한손에 들고 좌판아줌마와 흥정하고 있는 저 외국인이나 바람개비 들고 그 옆을 뛰는 아이가 이런 사연을 알 리가 없다.
 
▲ 올해로 60주년을 맞이한 김해중앙교회.
복잡한 시장 한가운데에 튀는 모습으로 우뚝 서 있는 김해중앙교회는 한국동란이 한창이던 1951년에 첫 예배를 시작해, 올해로 환갑의 60주년을 맞이한단다. 낮은 곳에 임하시는 구세주의 가르침에 참 걸맞은 환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동명 담임목사의 시무로 전 인제대 디자인대학장 손광호 교수, 전 김해시 가야문화사업소 박정수 소장 등의 장로들이 2천400여 명의 교인들과 함께 예배보고 전도하고 있다.
 
교회를 나와 오른 쪽으로 시장 네거리를 건너 중앙기원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들어, 남동쪽으로 비스듬히 옥천식당, 봉황이용원, 청송축산물전시판매장을 차례로 지나면 공구상가가 있는 오거리에 이르는데, 여기서 경남신문을 끼고 오른 쪽으로 돌아 구 봉황초등학교 쪽으로 향한다. 시장네거리에서 축협 앞을 지나가면 훨씬 더 가까울 텐데, 굳이 이렇게 더 갔다가 되돌아오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중앙기원~오거리~봉황초등학교까지의 1차로 길이야말로 봉황대의 가락왕궁을 둘러싸고 있던 봉황토성의 성벽라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길을 가는 우리 발밑에는 앞에서 봤던 것과 같은 봉황토성의 뿌리들이 고스란히 잠들고 있을 것이기 분명하기 때문이다. 가야왕궁을 두르는 성벽으로 다시 태어날 날을 꿈꿔본다.


Tip. 고구려 광개토왕 군대가 봉황토성까지 진격? ───────

2003년 11월, 봉황토성의 발견으로 가락왕궁의 자리에 대한 시비는 이제 마무리되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만, 한 가지 더 새롭게 논의되어야 할 문제가 생겼습니다. 발굴조사단에 따르면, 봉황토성은 5세기 초에 경영되고 있었던 성이라 합니다. 5세기 초라면 가야가 고구려와의 전쟁을 치루고 있었을 때입니다. 압록강 변에 서 있는 광개토왕릉비는 서기 400년에 진행된 가야와 고구려의 전쟁을 전하고 있습니다. 비문에 따르면, '임나가라'와 '아라'의 가야국들이 왜와 연합해 신라를 공격하였는데, 이를 이겨낼 수 없게 된 신라왕은 고구려 광개토왕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광개토대왕은 5만의 보병과 기병을 파견하였습니다. 압록강과 한강을 건너고, 죽령을 넘어, 경주에 들어온 고구려군은 가야와 왜를 축출하고, 뒤를 쫓아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즉시 항복했다 합니다. 이 '임나가라'가 어디고 '종발성'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가 중요한 논쟁의 하나였습니다. 필자처럼 경북 고령으로 보는 의견도 있고, 우리 김해로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시청 문화재과에 근무하는 송원영 계장이 부산대에 제출한 석사학위 논문에서 '종발성'을 화분 분(盆) 또는 사발 분(盆)의 분성(盆城)으로 해석하면서, 봉황토성의 발굴성과와 "수로왕이 흙을 쪄서 성을 쌓아 盆城이라 이름했다"는 기록과 연결시켜 다시 김해설을 주장하였습니다. 고고학 자료와 어울린 지명풀이가 신통하게 보여 수용여부를 두고 고민 중에 있습니다. 그래서 후생가외라 하는 모양입니다.






이영식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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