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 = 범지 박정식


김해성을 향해 물밀듯 밀려드는 왜군
사충신을 중심으로 결사항전으로 맞서
의로운 죽음으로 끝난 임란 최초 의병전
그들이 진 자리 아직도 그 향기 남아

2.
두 번째 전투가 끝난 뒤에야 총사령관 구로다는 김해성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았다. 높은 성벽과 깊은 호에 기대어 있는 김해성에서 시간을 끈다면 한양까지 단시일에 진격하려던 계획이 실패할 수도 있었다. 은빛 의자에 높이 앉아 김해성을 노려보던 구로다는 군사들을 성의 북쪽으로 보냈다. 구로다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며 성의 젖줄이 되고 있는 호계천 상류를 흙가마니로 막았다. 호계천의 물길이 막히자 제일 먼저 실개천이 말랐다. 그리고 개천과 우물이 점점 마르기 시작했다. 
 
김해성 조선군 진영에서는 구로다의 전략을 알지 못했다. 겹겹이 성을 에워싸고 있는 왜군의 수가 엄청나기는 했으나, 해동문에서 백응량(白應良)이라는 군사가 대궁을 쏘아 말 탄 왜장을 쓰러뜨리자 사기가 충천해있었다. 백응량은 세 번 더 활을 쏘아 왜군 세 명을 쓰러뜨렸다. 
 
해동문에서 장수를 잃자 왜군의 세 번째 공격이 시작되었다. 세 번째 공격은 훨씬 적극적이었다. 호를 헤엄쳐 건넌 왜군들이 사다리를 놓고 성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조선군은 돌과 끓는 물을 부었다. 어린아이 노인, 부녀자 할 것 없이 모두 달려들어 돌을 던지고 끓는 물을 부었다. 낮이 제법 기운 뒤에 왜군은 세 번째 공격을 멈추고 물러났다. 군사들과 피난민들이 지친 몸을 잠시 쉬고 있을 때, 세 번째 공격에서 실패한 왜군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해괴망측한 춤을 추는 등 야료를 부렸다.
 
세 번 적을 물리치기는 했으나 김해부사와 의병장들은 불안했다. 성호를 건너 성벽을 오르는 왜군을 막아내느라 군사와 부민들은 지쳐 있었다. 식량은 바닥이 났고, 성내의 개천과 우물이 말라버렸다. 김해부사와 의병장들은 애타게 원군을 기다렸으나 경상우병사는 물론이고, 창원뿐만 아니라 창녕, 의령 등 각 고을의 수령들에게서도 서찰 하나 없었다.
 
김해부사는 각 성문을 맡은 의병장들을 불러 작전회의를 열었다. 그런데 중위장 초계군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중위장을 찾아오라. 한 시가 급하다."
 
김해부사가 내린 영을 듣고 나간 부관이 잠시 뒤 돌아왔다. 부관은 초계군수가 해서문 수문장을 베고 달아나 버렸음을 알렸다. 어이없는 사태에 의병장들은 할 말을 잃었다. 김해부사가 분연히 일어나며 당장 가서 잡아오겠다고 나섰다. 송빈이 김해부사 역시 싸울 마음을 잃어 달아날 작정임을 알고 크게 꾸짖었다.
 
"나라의 은덕을 입은 관리로 성의 방어를 맡았으면서 이런 위급한 때를 만나 거취를 가벼이 하다니, 용서할 수 없소이다."
 
해가 질 무렵에 왜군은 한 번 더 성을 공략했다. 호를 건너 성벽을 오르는 왜군의 수는 갈수록 늘어났다. 죽을 힘을 다해 네 번째 전투를 치른 군사와 부민들은 지칠대로 지쳐버렸다. 그 와중에 김해부사까지 성을 빠져나가 사라져 버렸다. 성을 지켜야 할 주장(主將)과 중위장이 달아나 버리니 군사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뿔뿔이 흩어져 제 살 길을 찾기 시작했다. 이대형과 김득기는 송빈으로 하여금 주장(主將)에 앉게 하고 결사항전의 결의를 다졌다. 그러나 흐트러진 전열을 정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때 마침 산산(蒜山·대동 예안리 마산)사람 유식(柳湜)이 수십 명을 이끌고 북문을 통해 입성했다. 왜군이 에워싸고 있는 상황에서 무사히 성으로 들어온 유식은 의병과 부민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이대형, 송빈, 김득기에게 유식은 백만원군과 같았다.  
 
유식은 성종 때 수군절도사를 지낸 문화 유씨 용(墉)의 손자였다. 유용은 전라우수사를 지냈고, 숭록대부판중추부사에 이르렀으나 말년에 주촌 천곡리 덕진교 상류에 낙향했다. 고려 때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명현(名賢)과 대작(大爵)이 수두룩했던 가문에서 태어난 유식은 뜻이 크고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는 절의를 가지고 있었다. 세상의 어지러움을 보고 벼슬의 뜻을 버리고 경서와 병서를 읽으며 지내던 중에 왜군이 월당진(月堂津·대동 월촌리)을 건너 김해성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유식은 왜군이 한양을 침범하면 임금이 욕을 당할 것이라 염려하며 백형(伯兄)에게 집안을 부탁했다. 유식의 뜻을 가상히 여긴 백형은 집안의 장정과 노비 1백을 모아 함께 가도록 했다. 주장 송빈은 유식에게 해서문을 맡겼다. 이대형이 공진문을, 김득기가 해동문을 맡고 송빈이 진남문을 맡으니 김해성은 의병이 지키게 되었다. 이때 유식의 나이 41세였고, 의병장 중에서 가장 젊었다.
 
유식은 성내 우물이 다 말라버렸다는 말을 듣고 망루로 올라가 지형을 살폈다. 그러더니 곧 관아로 달려와, 객관 앞의 마당을 파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객관 마당에서 폭포 같은 물줄기가 솟아올랐다. 의병들과 부민들이 하늘이 돕는다 기뻐했다.
 
네 사람의 포의(布衣·벼슬이 없는 선비)가 선두에 서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김해성을 지킬 것을 다짐하고 있을 때 함안 사람 이령(李伶)이 왜군과 싸우기를 각오한 수십 명의 의병과 함께 또 입성했다. 김해성은 다시 결사항전의 의기로 넘쳐났다. 
 
왜군 첩자가 성내에 있다가 이 일을 목격하고 조선군 중에 신장(神將)이 있다며 구로다에게 알렸다. 그러나 구로다는 코웃음을 쳤다. 구로다는 들판에 가득한 풋보리를 베어 성호를 메우게 했다. 그리고 그 일을 조선군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밤새도록 소규모 소동을 일으켜 조선군 진영을 교란하도록 했다. 
 
4월 20일. 이른 아침 동문을 지키던 김득기와 병사들은 밤 사이에 성벽 아래 성호가 보릿단으로 메워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아연실색했다. 수많은 왜군들이 풋보리를 베어 날라 성호를 메웠고, 그 높이가 이미 성벽에 가까워져 있었다. 보릿단을 밟고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왜군이 성벽을 타고 오르는 중이었다. 김득기는 있는 힘을 다해 싸웠지만 해동문에서 유식이 있는 해서문 쪽으로 물러났다. 
 
성안으로 쏟아져 들어온 왜군은 조총과 대포, 화살을 퍼부으며 해서문으로 밀려왔다. 해서문이 무너지자 김득기와 유식은 해동문으로 갔다. 해동문에는 공진문에서 밀린 이대형이 와 있었다. 의병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왜군과 맞섰다. 여기저기서 몸이 쪼개지고 피가 나는 아비규환의 전투가 벌어졌다. 군사와 부민이 왜군의 칼날 아래 무참히 쓰러졌다. 피가 흘러 내를 이루고 시체가 언덕이 되었다. 
 
마침내 이대형, 김득기, 유식은 전패(殿牌· 임금이 있는 곳을 나타내는 전(殿)을 나무판에 새겨 객사에 위패처럼 걸어 놓은 것)가 걸려 있는 객사까지 밀렸다. 왜장은 세 의병장을 차마 죽이지 못하고 항복을 종용했다. 그러나 이대형, 김득기, 유식이 거부하고 무기를 버리지 않으니 왜군들이 칼과 창으로 수없이 찔렀다. 이대형, 김득기, 유식은 의병들과 함께 전패 아래서 절명했다.
 
세 의병장들의 죽음을 목격한 한 부민이 진남문에서 버티고 있는 송빈에게 몸을 피하기를 권했다. 송빈은 듣지 않고 절명시를 읊은 뒤 성내 큰 돌 위에서 마지막까지 왜군을 베었다. 왜군이 칼과 창으로 무수히 찌르고 사지를 잘랐으나 입이 움직일 때까지 왜군을 나무라다 마침내 절명했다.
 
한편, 부친의 뜻에 따라 이대형의 아들 이우두와 이사두는 상동 감물야촌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김해성으로 부친을 찾으러 갔는데, 큰아들 이우두는 왜군에게 잡혀 죽고 말았다. 부친과 형의 시신을 찾지 못한 이사두는 빈 상여로 감물야촌 봉발산에 초혼장(招魂葬)을 지냈다. 
 
파죽지세로 북진하다 진주성에서 패한 왜군은 이듬해 8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진주성을 공략했다. 이때 경상 여러 지역에서 의병이 창궐했는데, 함안의 주익창(周益昌), 필창(必昌) 형제도 분연히 일어나 칼을 잡았다. 주익창, 필창 형제가 장렬히 죽으니 두 아내 이씨(李氏)와 김씨(金氏)도 못에 몸을 던져 죽었다. 그 주익창의 아내 이씨 부인이 이대형의 형 이대윤(李大胤)의 딸이었다. 재령 이씨 한 가문에서 충신, 효자, 열녀가 났다 하여 일문삼강(一門三綱)이라 하였고, 관천재가 있던 마을은 삼방동(三芳洞)이 되었다.
 
송빈이 마지막까지 왜적을 꾸짖다 순절한 바위는 부친 송창(宋昌)이 고을의 향우들과 우의를 다지고 뜻을 함께하며 이름을 새긴 바로 그 바위였다. 김해 여러 지역에 있는 지석묘 중 하나이기도 한 그 바위에 후일 후손들이 송공순절암(宋公殉節岩)이라 새겼다. 송빈의 아들 송정백은 시체더미 속에 엎드려 있다가 겨우 목숨을 건진 양업손(梁業孫)을 통해 부친의 처참하고 의로운 죽음을 알게 되었다. 부친의 시신 일부를 겨우 찾아 장사지낸 송정백은 곽재우 휘하 의병으로 들어가 부친의 뜻을 이었다. 곽재우는 김해성 전투가 끝난 이틀 뒤 의병을 일으켰다. 
 
김득기의 아들 김간은 부친이 일러준 대로 식솔들을 데리고 주촌면 노래실(양동리)로 피난을 갔다. 김해성이 함락되자 부친의 시신을 수습하러 잠입하였으나 밤중이라 시신을 찾지 못했다. 김간은 부친이 남기고 간 도포와 머리카락으로 선산에 장사를 지냈는데, 어느 날 왜군 소부대가 노래실로 쳐들어왔다. 식솔들과 마을사람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갑자기 산 위에서 많은 병사가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진군하는 소리가 들렸다. 김해성 전투에서 의병에게 호되게 당한 왜군 소부대는 엄청난 의병이 몰려오는 줄 알고 혼비백산해 달아나버렸다. 왜군이 달아난 뒤 김간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 보니 아무도 없었다. 세상에서는 죽은 김득기가 후손을 지킨 것이라 했다. 
 
유식이 객사 앞에 판 우물은 유공정(柳公井)이라 하여 이후 오랫동안 김해성에 식수를 공급했다. 후일 후손들이 우물을 메우고 그 자리에 비를 세웠으니, 지금도 그곳에 있다.
 
한편 김해성을 버리고 달아났던 초계군수 이유겸은 후일 전쟁 중 도망한 죄를 물어 참수되었다. 김해부사 서예원은 같은 죄로 삭탈관직 당했으나 이후 고령과 거창에서 발기한 의병장 김면(金沔) 휘하에서 활동하다가 김시민의 뒤를 이어 진주목사에 임명되었다.
 
함안 사람 안민(安慜)은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즈음에 상동 감로사에 선조 안향(安珦)의 시판(詩板)을 다시 만들러 와 있었다. 안민은 왜적이 김해성을 함락하고 양민들을 처참하게 도륙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장정 백여 명을 모아 김해성으로 향했다. 그러나 입석강(立石江·불암동)에서 왜적의 대부대와 맞닥뜨려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며칠 뒤 소식을 듣고 찾아온 아들 신갑(信甲)이 부친의 행적을 쫓다가 "조선 충신 안민 여기서 죽다(朝鮮忠臣安愍死此)"라고 적은 판자와 뿔로 된 호패를 발견하고, 이를 수습해 장사지냈다.
 
김해성 전투는 이렇게 끝이 났으니,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전이었다. 의로움으로 피어난 꽃 이대형, 송빈, 김득기, 유식은 목숨을 다했으나, 꽃이 진 자리에는 아직 그 향기가 남아 있다.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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