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벗어나 문화의전당 전시 관람
전혁림 화백 탄생 100주년 기념전
예술의 세계 빠져 볼 행복한 외출

50여 년 전 부산 '대한도기'서 조우
한국화단 실력파 인정 뒤 취재로 재회
여인숙 골방에서 불태운 고난의 예술혼

10대에 고향을 떠나 근 40년을 객지에서 살다가 귀향한 지 10년이 조금 지났다. 고향을 떠나 있던 그 기간에 김해는 인구 50만 명을 훌쩍 넘어 60만 명을 넘보고 있다. 대도시 명칭을 획득한 만큼 급속한 팽창을 거듭해 예전의 김해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가히 몰라볼 정도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내가 출향할 즈음의 김해읍 인구는 3만 명 미만이었으나 지금은 시내 지역만 대충 잡아도 30만 명은 더 될 성 싶다. 원주민 인구와 유입 인구를 견줘보면 외지에서 들어온 유입 인구가 몇 배나 많다. 인구가 불어나면 집을 많이 짓고 없던 길도 생기고 산을 뭉개서 공장도 많이 들어선다. 이래저래 도시의 외형이 변하고 덩치가 커지는 만큼 그에 상응하는 새로운 사회질서도 조성된다.
 
따라서 지금의 김해는 모든 면에서 예전에 출향할 당시의 김해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때론 김해서 태어나고 자란 내게도 낯설고 되레 객지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어 당혹스러워 운 적도 있다. 세월에 따른 변화는 어디든 마찬가지더라. 지난주 경기도 부평에 다녀왔다. 기억 속에 부평하면 봄이면 배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인천 가는 도중에 있는 소읍이다. 그런데 그날 다시 보니 기억 속의 소읍은 흔적이 없고 중소공업도시가 되어 있었다. 하긴 김해와 부평이 공장개수 많기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는 보도를 읽은 기억이 난다.
 
혹자는 나더러 고향의 발전한 모습을 괜히 마땅찮게 여기고 알량한 감상에 젖어 아쉬움의 넋두리를 토로하는 것은 아닌가, 라고 지적을 할지도 모르겠다. 기실 '당신은 변하고 당신이 떠나 있어도 고향은 꼼짝 말고 가만 있어야 한단 말인 가요'라는 환청에 머쓱해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아니다. 단지 세월의 흐름이 사람의 기억을 지우기도 하고 뭔가에 대한 애잔한 마음을 일으키기도 하는구나, 하는 개인적 심상의 한 단면이 그렇다는 것일 뿐이다.  
 
아무튼 돌아온 고향이 예전과 달라도 너무 달라진 것은 소소한 생활상에서 표가 난다. 우선 고향에 돌아와 살고 있어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하다못해 길흉사로 발걸음을 하는 그렇고 그런 잡다한 볼일도 별로 없다. 당연히 읍내(나는 아직도 구도심을 읍내라 한다.) 나들이도 아주 드문 하다. 이거 뭐! 돌아온 고향이 단순한 숙식처일 뿐 생활의 실체는 여전히 전에 살던 도시에 예속돼 있는 걸까, 라는 생각에 마음이 거북할 때도 더러 있기도 하다.
 
그래서 근래 들어서는 일부러라도 김해에서 해야 할 일거리를 만들어 내고 읍내 나들이도 자주 하고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그럴 작정을 하고 있다. 마침 읍내에 나갈 일이 생겼다. 읍내에 있는 김해문화의전당에서 '전혁림 화백 탄생 100주년 기념전'이 열리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내일은 전시회를 보러 읍내로 나간다.
 

▲ 판화가 주정이 씨가 김해문화의전당 윤슬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혁림 탄생 100주년 기념전'을 둘러보고 있다.

1960년대 초반, 당시는 내가 만화가로 활동할 때다. 가깝게 지내던 만화계의 후배가 도자기공장에서 일한다는 전갈이 왔다. 얼굴도 한번 보고 도자기 만드는 공정을 구경도 할 겸 놀러오라고 했다. 그가 일러 준 대로 공장을 찾아갔다. 영도다리를 건너서 좌측방향으로 멀지않은 곳에 큰 공장 건물이 나타났다.
 
당시 조선방직과 함께 부산에서 규모가 가장 큰 회사답게 공장 부지도 넓고 건물도 크고 건물 동수도 많았다. 마당에는 고령토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모양이 공장지붕 너머로 보이는 고갈산과 닮은꼴이다, 라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공장 안에는 기다란 작업대에 많은 직원들이 줄이어 앉아서 초벌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후배가 반갑게 "여기"라며 손짓을 했다. 그러자 옆에 있는 중년의 남자도 힐끗 돌아봤다. 그때 그 후배는 현재 성공한 화상이 되어 있다. 옆의 중년 남자, 그는 다름 아닌 통영 출신의 전혁림 화백이었다. 그때의 그 도자기공장은 동양 최대의 도자회사였던 대한경질도기주식회사였다.
 
그보다 앞서 그곳 대한도기에서는 피난 시절에 부산으로 피난 온 많은 유명화가들이 생계를 잇기 위해 도자기 접시나 화병에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하였다. 당시 화단에서 내로라 하던 김은호, 변관식, 장우성, 김학수, 이규옥, 황염수 등을 비롯해 서울대에 재학 중이던 김세중, 서세옥, 박노수 등의 청년작가들에 이르기까지 군정훈국 소속의 종군화가로 활동한 소수의 화가를 빼곤 거의 모든 유명화가가 그곳에서 일하다시피 했다.
 
우리나라 미술계의 부흥기라 할 법한 1970년대 중반 미술전문잡지 <계간미술>에서 유명 미술평론가들에게 작품은 좋으나 과소평가되고 있는 작가를 한 명씩 천거하게 했다. 이에 미술평론가 석도륜이 전혁림을 천거한다. 그 내용이 실린 <계간미술>이 발간되자 미술계를 비롯한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선 전혁림이란 생소한 이름을 두고 '도대체 전혁림이란 작가가 누구냐' 라는 궁금증을 일으키며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전혁림은 일찍이 고향 통영에서 통영문화협회 창립 동인(유치진, 윤이상, 김춘수, 김상옥 등 참여)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1962년 전혁림이 국전에 출품한 반추상작품인 '늪'이 심사 결과 대상수상작으로 선정되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공식발표에서는 그 아래 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사유가 가관이었다. 전혁림은 대상 수상자로 연락을 받고 불려 갔다. 보도자료용 사진촬영을 하게 되었다. 작품 앞에 서서 포즈를 취하려던 전혁림의 입에서 "젠장! 남의 작품이 바로인지 거꾸로인지도 모르고 심사를 했구먼"이라는 어이없다는 탄식이 새어 나왔다. 전혁림의 작품이 거꾸로 걸려 있었던 것이다. 난리가 난 것은 불문가지. 국전 운영위 측에서 부라부라 사태 수습을 한다고 한 것이 말도 안 되게 대상과 차석의 순위를 바꿔치기하고 입단속을 하는 것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철저한 비밀에 부쳤다.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중앙화단의 일부 패권세력은 암묵적으로 전혁림을 도외시하게 됐다. 전혁림 역시 중앙화단에 대한 관심을 끓고 통영과 부산을 주 발표무대로 삼아 작품 활동을 하게 된다. 석도륜이 <계간미술>에 전혁림을 과소평가작가로 천거한 직후 전혁림과 동향의 시조시인 김상옥이 당시의 유명한 월간교양지 <샘터>에 국전사건의 전말을 에세이 형태로 실었다. 당시 김상옥은 인사동에서 표구점을 겸한 고미술가게를 운영해 백자에 대한 탁견과 아울러 미술계에도 상당한 영향력이 있는 인사였다. 그 일로 전혁림은 또 한번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비로소 변방의 작가에서 한국화단의 실력 있는 작가로 조명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전혁림이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였으니 입신치곤 참 늦은 입신이었다.
 
그렇게 전혁림이 실력파 작가의 반열에 오르자 조선일보에서 대규모의 '전혁림 작품전'을 기획하면서 부산대의 김해성 교수에게 도록에 실을 평문을 의뢰했다. 김 교수가 전혁림을 취재하러 가면서 동행을 권하기에 같이 갔다. 전혁림은 운하교를 넘어 용화산 기슭에 반듯한 집을 장만하고 따로 작업장도 갖추고 있었다. 오랜 세월 궁핍한 생활을 감내해온 당신이 이젠 재료 걱정, 생활비 걱정 안하고 마음껏 작품에만 몰두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것을 보며 우리 둘은 우리 일처럼 기뻐했다. 그날 전혁림은 부산서 온 두 후배를 환대하고 한사코 사양을 해도 "가면서 맛있는 거 사 잡수시라"며 두툼한 노자 돈까지 쥐어주었다.
 
전혁림은 입신하기 얼마 전 까지 부산 중앙동 옛 부산일보 사옥 뒤편 동광동 계단 옆 부일여인숙의 한 평 반짜리 좁디 좁은 골방에서 숙식과 작품 제작을 함께하는 고난의 하루하루를 오직 예술혼 하나로 지탱하고 있었다. 그랬던 그가 한국화단의 대표적 작가의 한사람으로 자리매김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열심히 작업에 매진하는 후학들의 귀감이 아닐 수 없다.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대표작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김해문화의전당 윤슬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시민의 문화 향유권을 누릴 좋은 기회다. "김해시민 여러분들에게 정중히 권합니다. 출중한 예술가의 예술의 세계에 풍덩 빠져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며 읍내로의 행복한 외출이 될 것입니다."




김해뉴스

주정이 판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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