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 할머니 댁에는 늘 해산물 풍성

▲ 김예지 (25·여·삼방동)
교통체증 피하려 언제나 새벽 귀성길
달콤한 '할머니 한과' 한가위 큰 기쁨

할머니 댁은 강원도 삼척 원덕읍 갈남리다. "얼른 일어나, 할머니 댁 가야지."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날 새벽이면 어머니, 아버지가 단잠을 깨웠다. 부모의 채근에 오전 1시 차가운 새벽 공기를 마시며 차에 오르는 것부터 추석은 시작됐다. 아버지는 명절 교통 체증을 피하기 위해 늘 새벽 일찍 어둠을 가르며 7번 국도를 따라 4시간이 넘는 귀성길에 올랐다. 차 안에는 항상 베개와 이불이 준비돼 있었다.

"아이고, 어서 오너라." 동이 틀 때쯤 할머니 댁에 도착하면 인기척을 느끼고 나온 할머니가 늘 따뜻하게 우리 가족을 맞아 주었다. 할머니 댁에 가는 길에 차에서 숙면을 취한 터라 아침 일찍부터 짠 바닷내음이 가득한 갈남항을 산책하는 것부터 추석 연휴의 첫 하루를 시작했다. 갈남항에서는 방파제를 따라 오징어가 해풍을 맞으며 춤을 췄다. 아주머니들은 삼삼오오 모여 찢어진 그물을 기우기 바빴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면 아침부터 물질을 한 아버지가 전복, 멍게, 해삼, 고동, 놀래기 등 각종 해산물을 양 손에 가득 들고 의기양양하게 집에 와 있었다. 주방에서 해산물을 다듬던 아버지는 살아 있는 전복을 반으로 잘라 다른 친척들 몰래 어린 딸의 입 안에 넣어 주곤 했다.

▲ 어릴 적 김예지 씨가 아버지, 언니와 함께 바닷가에서 고둥 등을 잡고 있다.

아버지 덕분에 추석 내내 밥상에는 각종 채소, 놀래기 회무침, 삶은 고동·전복, 해삼회가 초장과 함께 빠지지 않았다. 아침을 먹은 뒤에는 나무젓가락과 페트병을 들고 바다로 나갔다.

아스팔트에서만 뛰놀던 도시 학생에게 바다는 살아 있는 놀이터였다.

갯바위에는 방게가 지천으로 돌아다녔다. 바위에는 따개비, 거북손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가져온 나무젓가락은 바위 틈새에 몸을 숨긴 방게를 꺼내는 용도로 사용했다. 잡히지 않으려는 방게의 집게에 손가락을 물리기도 여러 번이었다. 방게를 잡자마자 물리지 않기 위해 집게를 떼어 내기도 했다. 바닷물을 채운 페트병이 방게와 고동으로 가득 차면 놀이는 끝이 났다.

이후 삼촌과 함께 물질을 나간 아빠를 마중하러 갔다. 삼촌의 손에는 나무 도마와 칼이 들려 있었다. 아버지는 바다에서 갓 잡은 해삼을 뭍으로 던졌다. 삼촌은 해삼을 바닷물에 씻어 먹기 좋게 잘라 줬다. 명절이면 해산물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던 탓에 전복과 해삼 등이 비싼 해산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스무 살 이후나 돼서였다.

할머니는 추석 때마다 가족들을 위해 찹쌀을 튀겨 조청을 양껏 바른 '할머니표 한과'를 만들었다. 마을 구멍가게에서 파는 과자보다 달콤한 조청과 바삭한 한과를 즐기는 게 추석의 기쁨 중 하나였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이후로는 할머니표 한과, 해산물로 가득했던 추석날 밥상은 추억이 돼 버렸다. 이제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추억이다. 가족끼리 오순도순 모여 추석을 보냈던 할머니 댁의 풍경이 그립기만 하다.


'어정 칠월, 둥둥 팔월' 온 동네가 들썩

▲ 이동신 (77·외동)
주민들 역할 나눠 8월 저물도록 풍물
비용 분담 돼지 잡아 집집마다 나눠


추석이 다가오면 '어정 칠월, 둥둥 팔월'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갈 수 없는 땅 개성이 고향이지만, 경북 고령에서 자랐다. 고령에서는 추석이 다가오면 풍물놀이부터 준비했다. 동네 사람들은 누가 쇠를 치고, 장구를 칠 것인지 역할을 나누었다. 추석이 지나고 팔월이 저물도록 풍물을 쳤다. '어정어정하다가 칠월이 가고, 팔월에는 풍물을 둥둥 울리며 지낸다'고 해서 '어정 칠월, 둥둥 팔월'이라고 했다. 20대 청년 시절에는 북도 치고 꽹과리도 쳤다. 그러나 장구는 장단을 맞춰야 하니 어려워서 못 쳤다.

추석이 다가오기 보름 전 무렵이면 집집마다 차례상에 올릴 술을 담갔다. 집에서 술을 담그지 못하게 조사하러 다니는 사람들도 명절에는 모른 척 눈감아 주었던 것 같다. 명절에 쓸 콩나물도 미리 기르고, 두부도 집에서 만들었다.

제수용품 장은 남정네들이 보았다. 장을 볼 때 차례상에 올릴 고기는 가장 크고 좋은 것을 골라서 샀다. 후손이 크게 잘 되라는 의미였다. 값은 깎지 않았다. 생물이 귀할 때였다. 말린 명태를 추석 하루 전 물에 불린 다음 솥에 쪄서 차례상에 올렸다. 차례를 지내고 난 뒤에 술안주로 최고였다.

온 동네 사람들이 추렴해서 돼지를 잡아 고기를 나누기도 했다. 돈이 있는 사람들은 미리 내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은 집에서는 추수가 끝나고 나서 돈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쌀로 대가를 내기도 했다. 차례상에 올릴 밤을 줍느라 동네 아이들과 함께 밤을 주우러 갔던 기억도 있다. 집안에 밤나무나 대추나무가 있는 집에서는 밤을 털고 대추를 따서 이웃들에게 차례상에 올리라고 나누어 주기도 했다.

명절음식을 만드는 어머니는 가마솥 뚜껑을 뒤집어 놓고 전을 부쳤다. 어렸을 때는 잔솔가지를 태우는 매운 연기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어머니 옆에 앉아 전 부치는 것을 지켜보곤 했다. 집집마다 장만한 음식을 서로 나누어 먹었다. 오가는 정이 넉넉하고 푸짐했다. 명절이 지난 뒤 남은 음식을 한데 넣고 잡탕식으로 졸여 먹으면 그게 또 별미였다.

늘 기우고 또 기운 양말만 신어야 했던 시절. 명절은 새 옷과 새 양말을 신을 수 있는 특별한 날이었다. 어머니가 사 온 새 옷을 입고 싶어서 몇 번을 들여다보았다가 덮어두었다가 했다.

추석날 아침이면 입을 수 있겠구나, 하면서 잠도 안 자고 날이 새기만을 기다렸다. 그 시절의 따뜻한 기억들을 떠올려보는 것으로도 행복하다. 


친척·손님 북적거려 음식 만들기 분주

▲ 박말희 (54·여·장유1동)
인정많은 어머니, 이웃에 음식 온정
분홍색 운동화 사달라 조르던 기억도


일곱 자매 중에서 셋째로 태어났다. 일곱 딸들은 추석이 되면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송편을 빚었다. 나는 송편을 예쁘게 잘 만든다고 칭찬을 많이 들었다. 반죽을 밀어서 컵으로 찍어 내 소를 넣고 모양을 냈다. 어머니는 "손으로 만드는 것은 뭐든지 잘 만든다"고 예뻐해 주었다.

아버지, 어머니까지 가족 9명이 방 안 그득히 앉아 송편을 빚었던 우리 집. 참으로 화목하고 따사로운 분위기였다.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고 보니 우리 집이 얼마나 화목했는지 알게 됐다.

어머니는 음식 솜씨가 좋았다. 일곱이나 되는 딸들이 도왔지만 일손은 부족했다. 우리 집은 큰집이었던데다 아버지가 배 사업을 하고 있어서 선원 가족들에게 나눠 줄 음식까지 만들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여기에 어려운 이웃집에 나눠 줄 음식까지 챙겼다. 차례를 지내고 나면 작은집들에도 음식을 나눠 주었다. 그 때문에 음식을 많이 했지만 막상 우리 가족이 먹을 음식은 부족했던 것 같다. 추석 때 넉넉했던 어머니의 마음을 담아 푸짐하게 만들어 골고루 나눠 주었던 음식들이 생각난다. 분홍색을 좋아해서 추석빔을 사러 가는 어머니에게 "꼭 분홍색 운동화를 사 달라"고 조르던 기억도 난다. 어머니는 밤, 대추, 호두 등을 넉넉히 넣은 약밥을 특히 맛있게 잘 만들었다. 남편도 "장모 약밥"이 최고라며 좋아한다. 그래서 명절 때면 어머니가 늘 사위에게 약밥을 챙겨 주곤 한다.

추석이 오기 전 우리는 아버지의 지휘로 대청소를 했다. 친척들이며 선원들이 많이 왔기 때문이었다. 나의 청소 담당구역은 마당과 화장실이었다. 마당은 제법 넓어 작은 정원 같았다. 한가운데에는 대나무로 만든 큰 평상이 있었다. 추석 때 집에 온 사람들은 평상에 앉곤 했다. 그래서 평상도 깨끗이 닦았다.

추석날 밤 달이 휘영청 떠오르면 모두들 마루와 평상에 앉아 달 구경을 했다. 어른들은 놀이삼아 우리들에게 마당을 돌며 달리는 시합을 시켰다. 우리는 까르르 웃으며 마당을 돌았다. 항상 동생들에게 져서 꼴찌를 했다.


외가 간다는 기대에 언제나 가슴이 두근

▲ 김은혜 (23·여·장유)
친척 오빠·동생 모여 즐거운 놀이 소일

집에서 간단하게 제사와 차례를 지내고 친척들과 헤어진 뒤 외가가 있는 함양으로 갔다.

나는 함양이 좋았다. 시골의 벌레 우는 소리도 좋았고, 도시와는 다르게 펼쳐지는 별을 수놓은 밤하늘도 좋았다. 무엇보다 함양으로 가는 길이 즐거웠던 것은 나이 차이가 많지 않은 외가 친척 오빠, 동생 들이 모이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사촌들과는 평소에도 추억이 많았다. 사촌들과 옹기종기 모여 할아버지 경운기를 타고 논에 나가기도 했다. 밤이 되면 친척 동생들과 함께 폭죽을 터뜨리며 놀았다. 겨울에는 아궁이에 고구마를 구워 먹기도 했고, 여름이 되면 할머니가 닭을 잡아 삼계탕을 끓여 줬다. 추석이 가까워지면 늘 가슴이 두근거렸던 이유는 외가에 갈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별세한 뒤 함양에 갈 일이 없어졌다. 여유롭게 들판에 누워 풀을 뜯어 먹는 소를 구경하는 일도, 아궁이에 앉아 검댕이 묻은 얼굴을 서로 보며 낄낄대는 일도 없어졌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일본에서는 추석이 큰 명절이 아니다. 쉬는 날도 아니었다. 그곳에서 추석이 될 때마다 외가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때의 추억이 그리워지면 향수병이 도진 것 마냥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지 반 년이 다 돼 간다. 6년 만에 친척들을 볼 수 있는 추석이 다가오니 예전 생각이 많이 난다. 이번 추석에는 다시 함양에 가고 싶다.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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