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쳐나는 현금에 동네는 축제 분위기
강원도 정선 탄광촌 '번개 상점' 인기
석탄 캐는 광부들 '백 신사'로 대변신
강원도 정선 사북면이 고향이다. 마을 이름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고향 사람들은 대개 '사북'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옛 탄광촌 일대를 개발해 하이원리조트(강원랜드)가 들어서 있다.
아버지는 '동원탄좌'라는 회사에서 광부로 일을 했다. 당시 광부들은 회사에서 마련해준 사택, 지금의 사원아파트에서 가족들과 함께 생활을 했다. 산골마을이라 물건을 파는 가게도 그렇게 많지 않았다.
하지만 추석이 다가오면 마을은 '별천지'로 바뀌었다. 대목 특수를 노린 외지 상인들이 '번개 상점'을 차렸기 때문이다. 명절에 앞서 회사에서 광부들에게 추석 상여금을 미리 지불했기 때문에 마을에는 상당한 현금이 돌았다.
평소 보지 못하던 진귀한 물건들이 곳곳에 진열돼 어른도 아이도 모두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장난감이 귀했던 시절이라 카우보이 모자와 총, 출처를 알 수 없는 장난감 트럭과 버스 등은 아이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평소 지갑을 잘 열지 않았던 부모들도 이때만큼은 가족들을 위해 아낌없이 돈을 썼다. 아버지가 사준 카우보이 모자와 총을 갖고 동네 친구들과 함께 '서부영화 놀이'를 즐겼다.
일부 어르신들은 한복을 입고 갓을 쓰고 다녔다. 명절 때만 되면 조용했던 마을에 활기가 가득 했다. 평소에 먹지 못했던 음식도 많이 먹을 수 있어 정말 좋았다.
강원도에서는 차례상에 배추전을 올렸다. 김해에서는 배추전을 보지 못했다. 이밖에 강원도와 경상도의 명절 음식에는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광부로 일했던 아버지는 진폐증에 걸려 부산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가족도 부산으로 이사를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이후 부산에서 결혼을 하고 2004년 김해로 이사를 했다. 산골마을에 비하면 부산에서의 명절은 정말 대단했다. 대도시라 물건 종류도 다양했고, 매일매일이 명절 같은 분위기였다. 평소 아이들 장난감을 사 줄 때면 명절 탄광촌의 추억이 많이 생각 난다.
삼촌 용돈 받아들고 문방구로 대행진
할머니 댁 모인 친척 동생들 맏형 노릇
밤 폭죽놀이에 맛있는 '불량식품' 까지
23년 전 추석은 차에 몸을 실은 채 여러 개의 산봉우리를 넘는 것부터 시작했다. 진영읍 진영리에서 차로 1시간 30분 거리. 당시 마산 합포구 구산면에 위치한 할머니 댁은 차로 가는 것부터 험난했다. 구불구불하게 이어지는 산길을 차로 넘는다. 행여 도로가 막히기라도 하는 날이면 할머니 댁에 도착하기 전부터 녹초가 되고 말았다. 집에서 아침을 먹고 출발하면 배꼽시간에 맞춰 점심시간 쯤 할머니 댁에 도착했다.
산 능선 바로 아래에 위치한 할머니 댁은 어마어마한 크기의 기와집이었다. 할머니 댁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마당에 주황빛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감나무와 하얀 토끼였다. 할머니 댁 뒤로 하늘 높이 솟은 대나무는 잎을 부비며 시원한 가을바람으로 인사를 건넸다.
주린 배를 채운 뒤 할머니 댁 마당에서 남동생과 놀며 하나 둘 모여드는 사촌동생들을 기다렸다. 늦은 오후 사촌동생들이 다 모이면 사촌동생들을 이끄는 맏형이 됐다. 그리고 곧바로 '맏형'으로서 삼촌을 졸라 용돈 1만 원을 받아냈다. 주머니가 두둑해지면 동생들과 함께 걸어서 30분이 넘는 곳에 있는 학교 앞 문방구로 향했다. '뭘 사지?' 문방구로 가는 내내 마음은 설렘으로 가득했다.
문방구는 연필, 공책 뿐만 아니라 아이스크림, 과자 등을 파는 만물상이었다. 어린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부푼 마음으로 문방구 안에 들어서면 그 때부터 판관 포청천이 됐다. 동생들은 사고 싶은 물건을 하나 둘 씩 집어 들고 왔다. 그러면 사야 할 것과 사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해 주는 역할을 맡았다. 아웅다웅하다 물건을 고르고 나면 검은 비닐봉지 안에는 항상 폭죽 5천 원어치, 불량식품 5천 원어치가 들려 있었다.
해가 빨리 지는 시골. 땅거미가 내려앉으면 돌아가는 길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무서워. 형이 앞장 서"라는 동생들의 말에 무서움을 꾹 참으며 앞에서 길을 안내해야 했다. 무서움을 이기고자 할머니 댁으로 열심히 뜀박질을 하기도 했다. 가족들의 온기가 가득한 할머니 댁에서는 고슬고슬 밥 짓는 냄새가 풀풀 풍겼다.
허겁지겁 저녁 식사를 마치면 대기업에 다녔던 큰아버지가 해외출장을 다녀오면서 사 온 외국과자에 관심이 집중됐다. 평소 볼 수 없던 과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우리들의 손에는 비싼 외국과자가 아니라 아폴로, 쫀득이 처럼 외국과자보다 더 달고 맛있는 '불량식품'이 들려 있었다.
시골이 깜깜한 어둠에 잠기면 동생들과 함께 문방구에서 샀던 폭죽을 들고 마당으로 나갔다. 기다리던 폭죽놀이가 시작된 것이다. "밤에 불장난하면 자다 오줌 싼다"는 할머니의 걱정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당에서 콩알탄 등 각종 폭죽을 장전했다. "펑펑." 시골 마을을 울리는 폭죽소리와 함께 하늘을 수놓은 불빛에 우리들은 넋을 잃었다. 폭죽소리에 시끄러울 법도 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마음 넉넉한 추석이었기에 아이들의 즐거움을 이해했다.
폭죽놀이가 끝나고 방으로 들어온 뒤 동생들과 베개싸움, 카드놀이 등을 하면서 어머니 손에 이끌려 잠자리에 들기까지 원 없이 하루를 즐겼다. 명절에 모이면 휴대폰, 컴퓨터 게임, TV 보기에 바쁜 요즘 아이들은 모두 함께 즐긴 우리들의 추석을 알기나 할까.
실망한 아이들에게 건네준 달콤한 바나나
장 보러 간 어머니 지갑 분실 난리
새옷 못 사 우울, 뜻밖의 선물 미소
30년 전 추석을 앞두고 어머니, 남동생 2명과 함께 부산진시장으로 추석빔을 하러 갔다. 시장은 인산인해였다. 옷가게에 들러 새 옷을 고르고 어머니가 값을 지불할 때였다. 지갑이 없어진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어머니는 잃어버린 지갑을 찾기 위해 우리 손을 잡고 동분서주했다. 우리는 울면서 그 뒤를 따라 다녔다. 결국 지갑은 찾지 못했다.
어머니는 코를 훌쩍이는 우리를 달래며 집을 향해 힘없이 걸어 가다 육교 위에서 잠시 멈춰 섰다. 주머니 속 동전 몇 개와 얼마 되지 않은 지폐를 세었다. 차비를 제외한 돈으로 노점상에서 바나나를 3개 샀다. 새 옷을 갖지 못해 실망감 컸던 우리에게 바나나를 선물한 것이었다.
당시 바나나는 병원에 입원을 하거나 특별한 날이 아니면 먹을 수 없는 귀한 과일이었다. 돈이 부족해 어머니는 사 먹지 못했다. 우리들 것만 챙겼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바나나의 맛은 달콤한 어머니의 사랑이었다. 요즘 아이들을 위해 바나나를 살 때면 어머니의 생각이 절로 난다.
추석을 앞두고 늘 반갑게 기다리는 친척이 있었다. 고향에 올 때면 늘 과자·사탕·카라멜 등이 들어 있는 '종합과자선물세트'를 들고 왔기 때문이다. 과자를 구경하기 힘든 때라 남동생들과 서로 맛있는 과자봉지를 잡기 위해 쟁탈전을 벌였다. 중재자인 어머니는 우리에게 과자를 골고루 나눠 줬다. 과자를 비밀 창고에 숨겨두고 아껴 먹었다.
다들 어려웠던 시기라 과자를 사 먹을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다. 과자봉지를 들고 나가면 동네 아이들에게는 인기가 최고였다.
추석날 밤 사촌형제들과 큰댁 마당에서 강강술래를 하다 발을 헛디뎌 장독대를 깨뜨려 큰어머니에게 호되게 혼난 기억이 난다.
차례상에 올리는 '깐 밤'에 대한 슬픈 추억도 있다. 할아버지는 남아 선호가 남달랐다. 그런 집안 분위기 때문인지 차례를 지낸 뒤 깐 밤은 동생들의 몫이었다. 깐밤이 정말 먹고 싶었지만 할아버지 눈치를 보느라 먹을 수가 없었다.
요즘 시댁에서 차례를 지내고 나면 조카와 딸에게 먼저 깐밤을 건네주고 하나를 먹는다.
어머니가 동그랑땡을 구울 때는 몰래 집어 먹기도 했다. 정말 꿀맛이었다. 지금은 먹을 것이 많아 아이들이 음식에 대한 욕심이 없지만 예전에는 명절 때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많아 그날을 기다렸다.
외로운 할머니와 함께 보낸 즐거운 하루
군 복무 중 소대원들과 봉사활동 나서
과일·떡·음료 놓고 '사랑의 덕담' 나눠
9년 전 군 복무를 하고 있을 때였다. 최전방이라고 불리는, 예전에 장동건·원빈이 주연으로 나왔던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의 배경이 됐던 부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일반전초(GOP)에서 6개월간 전방 철책선 경계임무를 한 뒤 전투지역전단(FEBA)으로 내려와 있었다. 반복적이고 힘든 훈련과 일과를 보내고 있던 터라 명절이나 공휴일은 휴식을 할 수 있는 고마운 날이기도 했다.
그러던 중 추석이 찾아왔다. 소대원들은 그 동안의 피로를 풀며 쉴 수 있겠다는 생각에 들떠 있었다. 이때 중대장이 내무반으로 들어와 추석 연휴를 뜻 깊게 보내자고 했다. 혼자 지내는 할머니를 찾아가 말동무도 하면서 봉사활동을 하자는 것이었다. 바깥바람을 쐴 수 있겠다는 생각에 선뜻 참여하기로 했다.
부대 인근 가게에서 과일과 떡, 음료를 사 들고 할머니 댁을 방문했다. 녹이 슬어 원래 색을 알아 볼 수 없게 된 철제대문과 오랜 세월을 견뎌낸 집을 보니 마음이 무거웠다. 집 안으로 들어서니 할머니는 놀라움과 반가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우리를 반겨 주었다.
부엌으로 들어가 과일을 씻고 떡과 음료를 차렸다. 할머니는 먼저 기도를 하자고 했다. 우리를 축복해 주는 기도였다. 그 한마디에 마음이 뭉클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저 바람이나 쐬러 가자는 심정으로 나섰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할머니는 굉장히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우리 얼굴을 들여다보며 이름을 불러 주었다. 남은 군복무 기간을 건강하게 잘 마쳤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보다 더 고마운 말이 또 있었을까.
할머니는 자신의 사연을 소개했다.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간 이야기, 한국전쟁에 참전한 남편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게 된 이야기, 그 이후 자식들을 키우며 살아 온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 주었다. 또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장사를 한 이야기, 단속을 피해 달아났던 이야기를 들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는 사람들과 둘러 앉아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을 얼마나 오래 기다렸을가. 그동안 외로움과 쓸쓸함을 어떻게 이겨냈을까.
음식을 다 먹고 상을 치우고 난 뒤 우리는 남은 집안 일을 하고 집 보수작업을 벌였다. 때가 타 더러워진 담벼락에는 페인트를 칠하고 예쁘게 그림도 그려 넣었다.
부대로 복귀할 시간이 됐다. 건강하게 안녕히 계시라는 인사에 할머니는 우리를 안아 주었다. 와 줘서 고맙다는 말씀과 함께. 그 할머니는 지금도 잘 계실까.
김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