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럭비는 전형적인 비인기종목이지만, 지난 해 9~10월 종주국 영국에서 열렸던 제8회 럭비월드컵은 FIFA월드컵과 하계올림픽 다음 가는 세계 3대 스포츠이벤트였다. 40여 일의 대회기간 내내 각국 응원단과 시민들의 물결로 영국 전역이 들끓었고, TV로는 209개국의 7억 7천200만 가구에 중계돼 수십억 명의 시청자들을 흥분케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대학교와 연세대학교의 전통 교류전인 고연전의 5개 종목 중 하나이긴 하지만 응원에 나선 두 학교 학생들조차도 룰을 몰라서 주심의 휘슬과 공수교대에 어리둥절해 하거나 득점의 셈법조차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럭비는 1823년 사립중학교 럭비스쿨에서 축구를 하던 윌리엄 웹 엘리스가 공을 들고 뛰었던 '반칙'에서 기원했던 스포츠로, 타원형의 럭비공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측불허의 상징이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룰 없는 격투기 비슷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럭비처럼 심판에게 절대 복종하고 상대방의 부상을 배려하면서 서로의 투지를 격려하는 스포츠는 없는 듯하다. 꽤 오랫동안 봐왔지만 심판판정에 대한 불복은 말할 것도 없고 사소한 항의조차 본 적이 없다. 근년에야 심판에게 하는 간단한 의사표현의 모습이 가끔씩 보이지만 오히려 그 모습조차 생소하게 보이는 게 럭비경기다.
 
더구나 심판은 단순한 판정자가 아니라 게임을 리드하고 선수들과 소통하면서 지도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경기를 운영하면서 "(업사이드니까) 물러서라" "(볼을) 만지지 마라" "(스크럼을) 똑 바로 밀어라" 등을 주문하기도 하고, 판정 이전에 캡틴을 불러 상황을 설명하고 선수들에게 전파할 것을 주문한다. 부상 예방과 훌륭한 경기를 위한 심판과 선수 간의 소통이 어느 종목보다 두드러지는 스포츠인 것이다. 판정에 대한 불복이 항다반사고, 심지어는 심판이 선수가 되기도 하며, 소통부재가 만성화된 우리 정치판이 꼭 본받아야 할 대목이다.
 
시합 당일 럭비선수들은 정장차림으로 운동장에 도착한다. 이미 고등학교 선수들의 교복차림에서부터 성인선수들의 넥타이정장에 이르기까지 신사적인 매너로 경기에 임하겠다는 마음가짐이다. 격렬한 충돌과 치열한 몸싸움에도 의외로 부상이 적은 것은 룰을 따르고 상대방 선수를 배려하는 정정당당한 승부의식에서 비롯된다. 선거부정으로 재선거에 우리 사회의 에너지를 탕진케 하는 '표식동물'들의 정치판이 꼭 배워야할 대목이다.
 
럭비의 중심철학은 '올 포 원(All for One), 원 포 올(One for All)'이다. 모든 선수는 공을 가진 한 사람을 지원하고, 한 사람은 모두를 위해 자기에게 맡겨진 궂은일도 서슴지 않아야 이길 수 있는 게임이다. 다른 종목도 마찬가지겠지만 태클이 허락되고 가장 많은 숫자의 단체경기인 만큼 개인과 전체의 역할 분담과 가치정립이 럭비처럼 두드러지는 종목은 없다. 영웅이 나기 어려운 풍토라든지 어떤 사안이 발생할 때 마다 시비나 전체보다 자신의 손득 따지기에 골몰하는 우리 사회와 정치판이 꼭 좌우명으로 삼아야 할 대목이다.
 
럭비에서는 경기종료를 '노 사이드(No Side)'라 한다. 다른 경기처럼 '타임아웃'도 아니고 '게임 오버'도 아니다. '노 사이드'란 이제 경기가 끝났으니 어느 편도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럭비처럼 경기가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남아 있는 종목은 별로 없다. 양 팀 선수들이 악수를 교환하며 최선을 다한 서로를 위로하고, 두 팀이 마주서서 이긴 팀이 먼저 진 팀에게 엄지를 세우며 치하하면 진 팀도 같이하며, 이긴 팀은 진 팀의 퇴장을 박수로 환송한다.
 
선거가 끝났는데 진 자가 불복하고 이긴 자가 모두를 가져가는 우리 정치판에도 럭비와 같은 '노 사이드' 정신이 필요하다. 총선과 시장 재선거가 있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올해의 정치판을 '붉은 원숭이'처럼 슬기롭게 치르기 위해서라도 럭비경기 같은 룰과 매너 그리고 철학이 지켜지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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