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영식 인제대 교수
조선 세종 7년, 1425년에 편찬된 <경상도지리지>는 우리 김해인의 특징을 강간(强簡), 역농(力農), 호학(好學)의 세 단어로 표현하였다. 김해라는 자연지리적 공간에서 살아 온 김해인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했던 인문지리지의 기술이다. 기록자의 선입관이나 주장도 포함되었겠지만 400년 지나 1833년에 간행된 <경상도읍지>에도 똑 같이 기록되었으니 김해인의 전통적 특성을 잘 나타내는 말로 보아 좋을 것이다. 본래의 문장은 '김해의 풍속이 강간, 역농, 호학을 숭상하였다'라고 돼 있으니, 원래 김해사람이 그렇게 생겼다기보다는 김해인이 숭상해 왔던 가치가 그러하였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봄이 좋을 것이다.
 
경상도 방언 사용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최고의 국어학자로 이윤재·허웅 두 선생이 나셨고, 최고의 한국문학 비평가였던 김윤식 전 서울대 교수와 일본 육군참모본부가 광개토왕릉비에 석회를 발라 날조했다고 주장했던 재일사학자 이진희 선생 등도 배출되었다. '좋을 호(好)'에 '배울 학(學)'처럼 배움을 즐기는 '호학의 김해인'은 충분히 인정될 만하다.
 
1930년대 이후 녹산과 대동에 수문을 지어 바닷물의 역류를 막고, 한림~생림~상동~대동의 곳곳에 제방을 쌓아 드넓은 김해평야를 만들어 냈다. 옛 김해만의 매립으로 가야~조선중기에 번성했던 해상왕국의 길이 막히자 사통팔달의 고속도로망을 이용해 산업을 유치하고 인구집중을 이뤄 냈다.
 
그러나 오늘의 정치판을 보면 정작 김해인이 첫 번째 덕목으로 숭상했던 '굳셀 강(强)'에 '대쪽 간(簡)'처럼 '강하고 대쪽 같은 김해인'은 참으로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중종 25년,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은 '김해의 습속이 강하고 간결함을 숭상한다'면서 김해사람들이 좋아하던 석전(石戰)놀이를 소개하고 있다. 매년 4월 초파일부터 아이들이 읍성 남쪽에서 연습하다가 단옷날이 되면 장정들이 좌우로 나뉘어 서로 기를 세워 북을 두드리고 소리 지르며 비 오듯이 돌을 던졌다. 죽거나 다치는 사람이 속출해도 승부가 나기 전엔 멈추지 않았기에 수령도 금하지 못하였다. 중종 5년인 1510년 제포(진해 웅천)의 왜인들이 삼포왜란을 일으켰을 때 돌 잘 던지는 김해인이 선봉에 나서자 적이 감히 나오질 못했다 한다. 거칠지만 박력 있고 용감한 김해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문제는 대쪽 간(簡)으로 묘사된 덕목이다. '간단하다, 간소하다' 등으로도 해석되지만 원래 글자의 뜻대로라면 '대나무 죽(竹)' 아래 '사이 간(間)'을 썼으니 칼로 내리친 대쪽이 갈라지는 것처럼 좌우가 분명한 모양을 가리킨다. 좌우가 분명하니만큼 복잡한 셈법을 싫어하고, 게다가 강한 것을 숭상하니만큼 한번 정하면 절개를 지켜 의리가 두터웠던 김해인의 성정을 나타낸 말이었다.
 
그러나 요즘의 선거판은 '철새'들에 의한 '야합'의 천국이다. 아니 철새라면 계절에 따른 주기라도 있으니 옮겨갈 때를 짐작이라도 하겠건만, 탈당과 소속정당 바꾸기를 손바닥 뒤집기보다 쉽게 하고, 사소한 개인적 이해관계에 따라 흩어지고 다시 모이는 꼴은 목숨을 걸고 낙동강과 시베리아 사이를 오가는 철새들에겐 대단히 실례가 되는 비유다.
 
'야합(野合)'이란 부모의 허락 없이 하는 혼인을 일컫는 말이었다. 뽑았던 유권자는 허락한 적도 없는데 저희들끼리 탈당하고 창당하는 모양이 하객도 없는 들판에서 자기들 맘대로 합치는 것과 같다. 엊그제까지 보수당의 대표로 호의호식하던 자가 갑자기 진보당의 대표로 모셔지고, 정치철학이 통하지도 않는 자들이 숫자를 채우기 위해 한 배 타는 야합의 중앙정치 아래 김해의 철새들과 야합을 탓하기도 어렵게 되었다.
 
금번 김해시장과 국회의원 출마자들의 이력을 보니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옮겨 다닌 이력들이 너무도 화려하다. 정당을 옮기고 패거리를 바꾸는 이들에게 정치철학이 무엇인지, 김해에 산적해 있는 여러 문제들에 대해 어떤 정책과 대안을 가지고 있는지를 묻고 판별하는 일은 신기에 가까운 일이 될 것이다.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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