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스 끝에서 터져 나온 물줄기가 눈부시게 갈라진다. 물줄기는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더니 흐릿하게 무지개를 만든다. 물줄기가 떨어지는 곳에서 수선화 몇 송이가 목을 축이고 있다. 봄볕은 얼굴을 발그레 붉히며 수선화 꽃잎 위로 따스하게 내려앉는다. 봄날의 오후 시간, 문인화가 여산 조성희(62) 씨가 텃밭에 물을 주고 있었다. 그의 작업실을 방문했다.

▲ 조성희 화가가 작업실 '여산 아뜨리에'에서 부채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작업실엔 식물, 액자 속엔 산수가 화사
피아노 위에 빽빽한 상패·위촉장도 눈길

중학생 때 두각… 고3 미술대회서 최고상
대학 들어가 문인화 접하고  매력에 푹
1986년 ‘국화’로 현대미술대전 대상

생계 위한 미술학원이 지금의 아뜨리에로
예총 없던 시절엔 미협 창단멤버로 활동

조성희의 작업실은 김해대로 2315번길에 있다. 고만고만한 낮은 집들이 길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서 있다. 주택들 사이 텃밭이 딸린 주택이 조성희의 작업실 겸 주거공간이다.
 
텃밭은 골목길에서 훤히 들여다보인다. 한 폭의 문인화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하다. 봄볕이 물줄기를 따라 반짝이며 수선화 위로 떨어지는 모습, 텃밭 중앙에 덩그러니 뿌리를 내리고 있는 나무 한 그루, 흙을 밟고 서 있는 조성희의 모습이 조각조각 텃밭 위에 세워 둔 그림 같다. 조성희는 "봄 날씨가 참 좋죠"라고 말했다.
 
작업실 안으로 들어갔다. 작업실 안에는 유난히 식물들이 많았다. 조성희는 "자연을 좋아하기 때문인지 식물이 잘 자란다. 이곳으로 이사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아직 텃밭의 땅을 일구고 있는 단계이지만 곧 봄의 끝자락에는 고추도 심고 상추도 심고 꽃도 심을 예정이다. 손에서 자라나는 것이 그림이든 식물이든 정성을 다 하면 잘 자랄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작업실 한 쪽 벽엔 대작들이 걸려 있었다. 액자 속에서는 포도송이가 열려 있었고 작은 새가 나뭇가지에 앉아 지저귀거나 산수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다른 쪽 액자 안에서는 목단이 화려한 색을 뽐내며 활짝 피어있었다. 몇 송이의 목단은 높은 채도의 붉은 색을 내고 있었고, 그 옆으로 몇 송이는 색을 넣지 않아 여백의 미가 살아 있었다. 목단은 조성희의 대표작품이다.
 

▲ 그의 작품 연꽃.
작업실에는 여러 개의 탁자가 붙어 있었다. 제자들이 오면 그 탁자에서 여러 명이 앉아 수업을 한다고 한다. 탁자 옆에는 피아노가 서 있었고, 피아노 위를 보니 여러 종류의 상패와 위촉장 등이 빽빽이 자리 잡고 있었다. 탁자와 피아노 사이를 가로질러 들어가니 작은 칸의 공간이 벽으로 구분 지어져 있었다. 그 속에는 소파와 낮은 탁자가 있었다. 조성희는 "그림을 따로 보관할 곳이 없는 탓도 있지만, 일부러 작품들을 작업실 곳곳에 배치해 놓았다. 소파 덮개와 쿠션 겉싸개에 있는 그림도 모두 직접 그린 그림들이다. 가방이나 접시, 한복 등에 그림을 그리는 작업도 즐긴다"라며 작업실 곳곳에 위치한 작품들을 보여주었다. 기자의 눈길에 걸린 사물들의 대부분에 그의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조성희는 대작들은 병풍이나 족자 형태로 따로 보관해 뒀다. 그는 그 그림들을 펼쳐 보여 주었다. 그가 선호하는 소재인 목단 병풍을 펴자 10미터 가량의 대작이 눈앞에 펼쳐졌다. 족자를 작업실 외벽에 걸자 연꽃이 활짝 핀 연못이 도로 한 가운데에 나타났다.
 
조성희는 김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김해여중과 김해여고를 졸업한 뒤 성신여대 미술교육학과에 입학하면서 고향을 떠났다.
 
"그림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건 중학생 때였어요. 고등학생 때는 미술시간의 수채화 수업을 선생님을 대신해서 했을 정도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홍익대에서 주최한 미술대회에서 최고상을 받으며 촉망 받는 학생으로 인식됐습니다. 홍익대를 들어 갈 수 있었지만 사범대가 없어서 서울대를 지망하게 되었어요. 그러나 한 차례 고배를 마시고는 성신여대에 입학하게 되었죠."
 
▲ 포도송이.
그는 대학 때 문인화를 접했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 문인화의 매력에 푹 빠졌습니다. 수묵화, 인물화, 영묘화(동물화), 초충도(곤충, 식물), 채색화, 사군자 등 한국화의 거의 모든 장르를 담은 그림이 문인화입니다. 특히 문인화는 시·서·화가 일치해야하는 종합예술이라는 점이 가장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는 졸업 후 경남 거창에서 3년 반가량 미술교사로 지냈다. 결혼 후 남편을 따라 마산에서 생활하다 1986년에 김해로 돌아왔다.
 
"결혼 후에도 화가로서의 길을 벗어날 수 없었어요. 1986년에 현대미술대전 문인화 부문에서 '국화'라는 작품으로 대상을 받았습니다. 큰 상을 받고서 금의환향 하듯 고향으로 돌아왔죠. 이후 생계를 위해 미술학원을 차렸던 것이 지금의 아틀리에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학원의 이름을 자신의 모교 성신여대에서 따와 '성신미술학원'이라 짓고 운영했다. 아틀리에를 차린 것은 약 10년 전부터라고 한다. 그의 아틀리에 이름은 '여산 아뜨리에'다. 그의 호 여산을 붙였다. 여산이라는 호는 서예를 가르쳐 주던 교수에게서 하사 받았다고 한다.
 
조성희는 지역의 미술단체 활동에도 활발히 참여해 왔다. "김해예총이 없던 시절 미술협회의 창단멤버로 활동했어요. 15명이던 회원이 현재 300여 명으로 불었네요. 현재는 미술협회에서 빠져 나와 김해금벌미술작가회의 회장 직을 맡고 있습니다." 김해금벌미술작가회는 김해에서 가장 오래된 종합예술단체라고 한다. 공예, 서각, 서예, 문인화 등 여러 장르의 미술인 20여 명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외에도 조성희는 난우미전, 서화작가협회, 경남미술협회 등의 회원이다.
 
▲ 아뜨리에에서 키우는 식물들(위 사진)과 각종 상장들.
"'아뜨리에'는 매주 토요일 오후 2시에 수업이 열립니다. 이외에도 요즘은 김해문화원, 김해도서관, 종합노인복지회관, 활천동·동상동·장유3동 주민센터 등 8군데에서 강의를 하고 있어서 매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인들은 저에게 '정도를 따르는 그림생활'을 하고 있다는 평을 합니다. 그림은 제 자존심입니다. 남들보다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아도 그림밖에 없습니다. 이런 자존심이 그림을 놓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된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동창회에 가도 언제나 당당합니다. 앞으로는 개인 전시를 여는 것이 목표입니다. 제자 양성도 저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는 한 계속 해 나갈 예정입니다."
 
조성희가 언제나 전지 사이즈 이상의 대작을 하는 이유는 자신감 때문인 듯 했다. 작은 그림엔 담을 수 없을 만큼 자신감과 소신이 넘쳐나기 때문에.

 

≫조성희/김해 출생. 1979년 경남도전 특선, 1983년 신미술대전 특선, 한국현대미술대전 동상, 대상 등 수상.

김해뉴스 /강보금 기자 amond@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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