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상근 가야대학교 통합대학원장.
국어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협치(協治)'라는 말이 요즘 세상의 화두가 되고 있다. 다소 생소하게 들리는 용어지만 '협력하는 정치'의 줄임말인 것 같다. 영어로 찾아보면 '거버넌스(governance)'라는 단어가 협치를 뜻한다. 학계에서는 우리말로 번역하기가 적절치 않고, 의미전달이 불분명하여 외래어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다만 거버넌스의 핵심적 의미는 정부에 의한 일방적 통치(governing)와 대비되는 소통과 협력에 의한 통치라는 것이 일치된 견해다.
 
정치권 모두가 협치를 주장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가장 아쉬운 처지는 새누리당이다. 여소야대 정국에서 야당의 협력 없이는 집권당의 역할을 전혀 못하게 되었다. 현 정부의 성공을 뒷받침해야 할 여당으로서 답답한 노릇이다. 야당도 시시콜콜 정권의 발목을 잡는 모습만 보일 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국정실패의 책임을 뒤집어 쓸 수 있는 상황이다. 절실하기는 청와대도 마찬가지다. 식물정부로 남은 임기를 마무리 하지 않으려면 야당과의 협치가 필수적이다. 더 이상 일방통행식의 국정운영으로는 국민의 신뢰를 받기 어렵게 되었다.   
 
총선 이후 대통령과 여야 3당 원내지도부가 청와대에서 만나 협치의 모양새는 좋게 만들었다. 그러나 회동 직후부터 해석은 제각각 내놓았다. 여당 원내대표는 협치의 실효적인 성과 가능성을 언급했고 야당 원내대표는 한계와 아쉬움을 밝혔다. 이런 입장 차이를 반영하듯 벌써부터 물 건너 간 분위기다. 5·18민주화운동의 기념곡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할 것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를 놓고 금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상시청문회를 명시한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협력의 정치가 아니라 협박의 정치를 걱정해야 할 것 같다.
 
정치권에 협치를 기대하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정치의 주체마다 해석하는 방식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야당은 자신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협치라고 생각한다. 반면 정부와 여당은 국정에 절대적으로 협조하는 것이 협치라고 해석한다. 그런 점에서 협치는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모든 정책결정 과정을 여야가 합의해서 추진한다면 이것은 협치가 아니라 연립정부 내지 거국내각의 형태가 된다.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는 속마음을 숨기고 겉으로 협치를 외치는 것은 갈등만 키울 뿐이다.
 
협치는 원래 정치인들끼리 소통하고 협력하는 의미가 아니다. 협치로 해석되는 거버넌스는 정부·NGO(비정부기관)·시민사회의 실질적 참여와 수평적 협력에 기초하고 있다. 시민사회에 보다 많은 권한을 부여하고 참여를 유도함으로써 공공의 이슈를 풀어나가는 것이다. 시민사회가 통치의 대상이 아니라 정부와 함께 공동의 목표를 정하고 공동의 이익을 위해 손을 잡는 대안적 국정 운영 방식이다.
 
또한 대의제 민주주의의 보완적 역할을 할 수 있다. 정당이 국가와 시민 간의 간격을 메워주는 충분한 역할을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다. 시민사회의 직접적인 참여를 통해 그 간격을 시민들 스스로 채워나가야 한다. 현재 정치권의 논의하고 있는 협치의 개념과는 본질부터 다른 것이다. 시민사회의 참여를 배제한 정치권만의 협치는 진정한 협치가 아니라 그들만의 잔치다. 오히려 협치를 명분으로 나눠 먹기식의 야합정치가 팽배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런 모습을 지켜봐 왔고 지금도 지켜보고 있다. 박근혜 정부도 협치를 하려면 시민사회를 배제한 협치가 아니라 정치권을 배제한 협치를 해야 한다.
 
그리고 거버넌스는 외국의 사례를 보더라도 중앙정부보다는 지자체 차원에서 광범위하게 시도되고 있다. 갈수록 지방정부 단독으로 풀어나갈 수 없는 난제들이 많이 생기기 때문이다. 앞으로 환경, 복지,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 시민의 참여 기회를 확대하고, 정책에 대한 공개와 토론을 활성화하고, 상호협력을 강화해 나가는 지방차원의 협치 모델이 개발되고 활성화되길 기대해 본다.  김해뉴스


외부 필진의 의견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