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경흠 신라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가락국은 넓디넓은 바다를 통해 세계와 교통하던 해상왕국이었다. 현재는 강물과 인간이 함께 만들어낸 평야와 튼튼히 버티어 온 산줄기가 근간을 이루고 있으나, 가락국의 수도 김해는 당연히 해상왕국의 바탕인 바다로 나아갈 수 있는 조건이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를 비롯한 수많은 자료에서도 김해와 바다의 관계는 항상 언급되고 있다.
 
서낙동강을 위 아래로 막고 있는 대저수문과 녹산수문 및 부산 낙동강하구언과 둑으로 이루어진 기름진 충적토가 김해인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고 있으나, 이러한 시설이 없었던 조선시대까지의 김해평야는 칠점산을 비롯한 아름다운 섬들이 군데군데 떠 있던 바다였다. 현재는 다리로까지 이어져 김해시내와 대저도, 덕도, 명지도, 대사도, 제도, 맥도 등이 한 덩어리처럼 보인다. 원래 이러한 섬과 섬 사이를 오고 가는 길은 강이 아니라 바다였다.
 
이 섬들은 이제 부산에 속하게 되었다. 또 수로왕비가 들어왔다고 알려진 망산도는 창원 진해구 용원동에, 혼례 첫날밤을 지냈다고 알려진 흥국사가 있는 지사동 등의 혼례길 또한 부산 강서구에 속해 있다. 수문을 열고 둑을 헐지 않는 한 그 옛날 '해상왕국의 수도'였던 김해는 이제 더 이상 해상도시라고 할 수 없다.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서 낙동강 물줄기가 삼차강을 거쳐 바다로 들어가는 경로를 '밀양 남쪽 30리, 김해 북쪽 50리 경계에 이르러서 뇌진이 되는데, 이곳은 해양강이라고도 한다. 남쪽으로 흘러 옥지연 황산강이 된다. 다시 남쪽으로 양산의 동원진이 되며, 남쪽으로는 삼차강이 되었다가 김해부 남쪽 취량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김해는 창원과 불모산을 경계로 한 것 외에 밀양, 삼랑진, 양산, 부산과는 모두 강을 경계로 하고 있다. 김해는 분명히 강의 도시다.
 
가락국 시대 김해의 강들은 김해를 지키는 해자 역할을 하는 확실한 경계였지만, 가야가 삼국에 복속된 뒤로는 경계가 아닌 통로가 되었다. 높은 산이 중압감을 주는 경계라면, 물건을 수송하고 사람을 옮겨주는 강은 오랜 세월 통로의 역할을 해 왔다. 물론 산길로 다니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았겠지만 강이 주는 교통의 역할은 이를 능가해 왔다.
 
강에는 배가 드나들 수 있는 포구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포구에서 이루어지는 상거래는 전국 곳곳 내륙시장보다 규모가 훨씬 컸다. 조선시대 물품, 재화, 인적 교류는 대부분 육로보다 수로를 통해 이뤄졌다. 산이 많은데다 수레나 도로가 발달되지 않아 육로를 활용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강이나 바다를 이용하는 것이 훨씬 빠르고 쉬웠다. 종래의 포구는 세곡이나 소작료를 운송하는 기지 역할을 했으나, 18세기에 이르러 상거래가 활발해지면서 포구는 상업의 중심지로 성장하게 되었다. 포구와 포구, 포구와 주변시장이 연계되어 상거래가 이루어졌다. 강은 경계가 아니라 통로이며 소통의 장이었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김해의 풍속을 소개하고 있다. '풍속이 강하고 질박한 것을 숭상한다. 석전(石戰·돌싸움)을 좋아한다. 매년 음력 4월 8일 아이들이 성의 남쪽에 모여 석전을 익힌다. 단오가 되면 장정들이 모두 모여 좌우로 나누어 깃발을 세우고, 소리를 지르고 펄쩍펄쩍 뛰면서 돌을 던지는데 마치 비가 오는 것 같다. 승부를 겨루다 죽거나 다쳐도 후회하지 않는다. 수령도 말릴 수 없다. 경오(중종 5년·1510)년 삼포왜란에 왜적을 정벌할 때 돌을 잘 던지는 자를 뽑아 선봉에 세웠더니 적병이 앞으로 나오지를 못했다.'
 
김해 모든 읍·면·동의 인터넷 홈페이지를 열면 첫 페이지에는 반드시 '마산, 김해, 삼랑진, 부산을 연결하는 교통 및 물류 수송의 중심지'라고 적혀 있다. 바로 김해의 위치 및 지리적 특성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김해를 두르고 흐르는 강은 바로 이러한 교통 및 물류의 중심으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최근 낙동강 하구언의 수문을 개방하라는 어민들의 요구가 거세게 일고 있다. 이는 어민들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낙동강 하류 전체의 환경과 관련해서 깊이 검토해야 할 문제다. 물은 흘러야 한다. 사람은 교류를 통해 소통하여야 한다.
 
김해인은 위기 상황에서는 돌을 던지며 강하게 저항했다. 이러한 강한 저항 정신은 김해를 버티고 발전시킨 원동력이었다. 저항 정신의 바탕에는 가락국을 감싸고 흐르던 경계로서의 강이 있었다. 지금은 저항이 아니라 소통해야 할 때다. 이렇게 서로를 위해 소통하고 교류를 하게 되면 강은 통로가 되는 것이다.
 
나라 전체의 강을 운하로 만들어 물류를 원활하게 하겠다거나, 물의 흐름을 막아 제대로 된 물 관리를 하겠다던 전직 대통령의 망상처럼 거대한 기획은 애초에 버려야 한다. 현재의 자연환경을 유지하는 선에서 김해시 관계자들이 강을 활용할 수 있는 방안들을 마련해 나갔으면 한다. 김해뉴스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