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 비롯해 지리지 등에서는 김해 사람들의 풍속을 '성격은 강하고 분명하며, 열심히 농사를 짓고, 배우기를 좋아 한다'고 하였다. 김해의 민속 가운데 하나로 왜구와의 싸움에서도 선봉에 섰던 석전(돌싸움)의 전통을 보면 김해 사람들의 강한 기질을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신나게 농사지을 수 있는 기름진 김해평야의 조건은
김해에서 소금이 생산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면 "에이! 말도 안돼! 염전을 만들 수 있는 갯벌 같은 자리가 있어야지"라고 하거나, "그래! 옛날에는 김해의 깊숙한 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으니 소금이 생산되었을 거야"라고 답이 나뉠 것이라는 상상은 전혀 나의 생각일 뿐일까? 높은 아파트와 공장이 들어선 명지와 녹산, 김해공항과
김해의 도심을 흐르는 대표적인 물줄기로는 김해 중심지의 서쪽을 흘러 바다와 맞닿게 되는 해반천(海畔川), 분산에서 시작해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호계(虎溪), 활처럼 휘어져 동쪽을 휘감고 흐르는 활천(活川)이 있다. 이 가운데 이나 읍지 등 지리지에 오랜 옛날부터 기록된 물은 호계 뿐이다. 이는 호계가 가진 김해에서의 위상을 말해주는
가락국은 넓디넓은 바다를 통해 세계와 교통하던 해상왕국이었다. 현재는 강물과 인간이 함께 만들어낸 평야와 튼튼히 버티어 온 산줄기가 근간을 이루고 있으나, 가락국의 수도 김해는 당연히 해상왕국의 바탕인 바다로 나아갈 수 있는 조건이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의 '가락국기'를 비롯한 수많은 자료에서도 김해와 바다의 관계는 항
김해공항의 서북쪽 끝 부대 담장이 둘러쳐진 주변 마을은 그 이름이 칠점(七點)이다. 이 마을의 이름은 부대 담장 안에 일곱 개 가운데 겨우 한 봉우리 남아 있는 칠점산에서 나왔다. 칠점산은 1978년 부산으로 편입되기 전까지만 해도 김해의 상징으로서 수많은 시인묵객들은 김해를 그릴 때 삼차강(三叉江)과 함께 특히 이곳을 떠올렸다. 이제는 부산의 것이 되었으
필자의 고향은 경상북도 예천군이다. 그러나 삶의 대부분을 부산에서 보냈다. 그러다보니 원래의 고향인 예천군보다는 부산이 훨씬 익숙하다. 그러나 뿌리를 이야기하라면 그다지 익숙하지도 않은 예천군은 물론이요, 조상께서 터를 잡으셨던 영월까지도 반드시 언급하게 된다. 필자는 1996년, 부산의 풍광과 역사 유적을 노래한 한시를 문집에서 골라내 이를 해석하고, 부
연자루는 고려시대의 주열(朱悅·?~1287)이 시로 읊은 이래 정몽주(鄭夢周·1337~1392), 권근(權近·1352~1409), 조준(趙浚·1346~1405) 등 고려조 시인들이 이를 이었다. 이제는 조선조 초기 시인 이원(李原·1368~1430)의 시를 보자. 앵무주 가에 방초는 푸르고 등왕
이 이야기를 믿자면 연자루는 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 이전부터 있다가 구형왕 9년에 한 번 사라졌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분명한 문헌이나 실제의 자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이것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고, 김해를 상징하는 건물이다 보니 가락국과 관련시켜 이러한 신비한 이야기가 전해져온 것으로 보인다. 연자루의 위치에 대해서는 함허정 문 앞이며 객관의 후원이라
이학규((李學逵·1770~1835)의 와 를 새롭게 번역하고 연구한 안미정 선생은 청뢰각(晴 閣)에 대해 '지금의 김해시 동상동에 있었다'고 하고, 의 내용을 통해 '객관 중문(中門) 밖에 있었으며 기축(己丑·1649)에 부사 이상경(李尙敬·1609~
이제는 김해의 가장 중심이었던 김해읍성 안으로 간다. 처음 만날 곳은 김해 행정의 중심으로서 부사가 고을의 일을 처리하던 김해부 동헌(東軒)이다. 동헌은 김해읍성의 서문에 가까운 지금의 서상동(西上洞)에 있었다. 지금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기는 힘든 상황이다. 다음은 조선조 전기 시인 홍성민(洪聖民·1536~1594)의 것이다. 산빛은 예로부터
고려 장군 박위가 왜적 방어용 산성 수축조선시대 김해부사 정현석이 개축둘레 1560척에 성안 마르지 않는 우물 둘봉수대인 만장대 해발 323m에 위치김해평야와 낙동강·동래·양산까지 조망해질녘 누각서 바라본 김해는 천하요새정몽주 '김해산성기'·허훈 시 여덟 수 전해과 등
에 진례성(進禮城)에 대한 소개는 '서쪽 35리다' 밖에는 없다. 오히려 이학규(李學逵·1770~1835)가 시의 주에 적어 놓은 '진례성은 김해부 서쪽 35리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수로가 그의 아들 하나를 진례성주로 삼고 왕궁(王宮)과 태자단(太子壇)과 첨성대(瞻星臺)를 세웠는데, 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거
(28)활천(活川) 해반천(海畔川) 덕교(德橋) 첨성대(瞻星臺) 자암(子菴)
에 '호계(虎溪)는 부성(府城) 가운데에 있다. 물의 근원이 분산(盆山)에서 나오며, 남쪽으로 강창포(江倉浦)로 들어간다'고 하고, 강창포는 부의 남쪽 6리 지점에 있다고 하였다. 1984년 이후 복개가 되어 예전의 아름다운 풍광을 볼 수는 없으나, 여전히 부원동을 관통해 지나며 김해의 오랜 핏줄로 흐르고 있다. 정조 14년(1
도요저(都要渚)는 양산시 원동면 용당리의 가야진(伽倻津) 나루 사이인 낙동강 하구를 왕래하던 나루터다. 삼랑진의 세 물줄기 아래쪽에 형성된 모래톱으로 바로 건너편이 삼랑진이다. 현재의 행정명은 김해시 생림면 도요리다. 에는 김해의 도요저는 본래 배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이곳이 나루터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장유사(長遊寺)는 김해시와 창원시의 경계인 불모산(佛母山) 또는 장유산(長遊山)에 있다. 계곡 이름마저 '장유'로 불리는 골짜기를 따라 오르다보면 맑은 냇물을 만나게 되는데, 여름이면 녹음의 서늘한 기운을, 가을이면 단풍의 붉은 기운을 골골이 녹이며 흐르고 있다. 꼬불거리는 길을 따라 걷다가 숨이 가빠 두 번째 쉴 때 쯤, 여기로부터 기운을 이끌어간 산
에는 이전에 보았던 귀암사(龜巖寺·영구암)·십선사(十善寺)·청량사(淸 寺)와 함께 이세사(離世寺)가 신어산에 있다고 하였다. 다른 기록이 없어 이 절에 대해서 더 언급하기는 어려우나 다행히 여기에서 읊은 시가 한 수 있으니, 그래도 위안이 된다. 다음 시는 고려 시대의 곽여(郭與:1058~113
전해오는 이야기로 김수로왕이 아유타국에서 온 허왕후의 오빠 장유화상과 함께 절을 창건하고 산 이름은 금강산(金剛山)으로, 절 이름은 금강사(金剛寺)로 하였다고 한다. 금강사의 위치에 대한 설명은 여러 자료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대부분의 자료에는 고려 장군 김방경(金方慶)이 일본을 칠 때 기도했다고 알려진 송악단(松岳壇) 또는 송악당(松岳堂)은 부의 북쪽
영구암(靈龜庵)은 신어산(神魚山)의 발원지라는 말이 있으니, 신령스러운 물고기 즉, 신어가 살았다는 샘이 여기에 있었다고도 한다. 영구암은 낙동강 하구나 부산 다대포 몰운대에서 바라보면 산에서 거북이 기어 나오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인제대학교를 지나 신어산 삼림욕장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골짜기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면 동림사(東林寺)와 은하사(銀
신어산(神魚山)은 신령스러운 물고기 모양을 그린 쌍어문(雙魚紋)에서 그 이름이 기원했다고 하고, 이 쌍어문은 허왕후가 인도에서 파사탑(婆娑塔)과 함께 들여왔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당시에 이미 불교가 한반도 남부에 들어왔다는 주장이 있기도 하다. 사실이야 어떻든 신어산은 많은 불교 전설을 안고 있으니, 불교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고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