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경흠 부산 신라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해 지리지 등에서는 김해 사람들의 풍속을 '성격은 강하고 분명하며, 열심히 농사를 짓고, 배우기를 좋아 한다'고 하였다. 김해의 민속 가운데 하나로 왜구와의 싸움에서도 선봉에 섰던 석전(돌싸움)의 전통을 보면 김해 사람들의 강한 기질을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신나게 농사지을 수 있는 기름진 김해평야의 조건은 농사에 힘쓸 수 있는 환경이었음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남명 조식이나 성재 허전에게서 영향 받은 김해 학문의 연원은 김해 사람들이 배우기를 좋아했을 이유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이러한 조건을 제대로 갖추었다고 알려졌던 곳이 김해에 있으니, 바로 도요다.
 
도요는 양산시 원동면 용당리의 가야진으로 건너가던 황산강의 나루터다. 삼랑진의 세 물줄기 아래쪽에 형성된 모래톱으로서 본디 이름은 물가 '저(渚)'자가 붙은 도요저였다. <동국여지승람>에 도요저에 대한 기록이 있다. '도요저는 김해부의 동쪽 30리 지점에 있으며 강을 따라 민가가 거의 200여 호다. 집들이 빽빽하게 늘어서서 울타리가 서로 잇닿아 있다. 농업을 일삼지 않고 오로지 배젓기만을 익힌다. 바다에 들어가서 물고기를 잡아 장사를 하는데, 상류 쪽 여러 고을로 다니면서 재산을 일군다. 풍속이 순박하여 한 집에 손님이 오면 여러 집에서 각각 술과 음식을 가지고 와서 예를 차린다. 혼사, 초상, 제사 때도 모두 그렇게 한다. 만약 어떤 집의 아내나 딸이 음탕한 행동을 하면 모든 집이 모여 의논해서 마을에서 쫓아내버린다.' 후대에 더해진 내용을 보면 '주민은 400여 호다. 마을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여 과거에 오른 자가 나오자, 사람들이 모두 앞 다투어 학당을 짓고, 여럿이 모여 글을 읽어 과거에 응시하는 자가 제법 많다'고 하였다.
 
도요를 중심으로 주변의 고을들은 조선조 당시 여성의 정절을 최고로 여기고, 과거를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분위기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단 하나 농사에 힘쓰지 않고 고기잡이에 힘썼다는 점이 김해를 설명하는 세 가지에서 다른 점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사실 농사에 힘쓴다는 것은 생업에 힘쓴다는 의미이니, 크게 어긋났다고 볼 수 없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 의병장 조경남(1570~1641)이 이두로 기록한 <난중잡록>에 실린 다음 이야기는 이러한 도요의 소박하고도 긍정적인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김해, 동래 등지의 사람들은 모두 왜적에게 붙어서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였으며, 여인을 더럽히곤 하였으니 왜적보다 심하였다. 김해의 경우 도요저 마을은 낙동강 연변의 큰 고장인데, 왜란 초기부터 왜적에 붙어서 도적질을 하고 혹은 지난날의 원수를 갚기도 했다.'
 
아름다운 풍광과 그에 걸맞은 풍속을 가졌던 도요. 그 도요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손님을 제대로 대접하고, 부정한 일이라면 이를 철저히 제거하고, 생업에 힘써 소박한 삶을 이루어가면서 학문에 힘쓰던 아름다운 풍속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김해는 오랜 세월 넓디넓은 바다와 평야, 강을 바탕으로 농사짓고 물고기 잡으면서 살아오던 소박한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공장이 빼곡히 들어차고 과거 도심인 동상동, 서상동 등을 벗어나면 아파트가 하늘 높이 솟아 있는 도시가 되었다. 사람 수도 늘고 차량의 수도 늘고, 대단히 복잡한 도시가 되었다. 그러다보니 예산도 커지고 이를 운용하는 공무원들의 숫자나 적용 범위 또한 넓어졌다.
 
요 몇 년 동안 김해는 부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시장의 뇌물 및 불법정치자금 수수, 시의회 의장의 금품 선거 등. 과거 소박하고 강인하며 분명하던 김해인의 바탕을 생각해본다면, 이는 마치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사리사욕과 정욕이나 채우려고 했던 임진왜란 때의 패거리들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든다.
 
'동틀 무렵 새벽밥 하곤 다시 불 때지 않고/ 여기저기 아이와 여자 배고픔에 억지로 운다/ 늙은이는 사람 놀랠만한 시구를 찾아보려고/ 봉창에 바르게 앉아 콧수염만 꼬고 있네'(정사룡·도요저 풍경)
 
전쟁으로 인해 잠시 정신줄을 놓기도 했지만, 도요 사람들은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아 고기잡이로 생업을 대신하며 굶주림에 고통을 받아도 분명한 생각을 버리지 않았고, 타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넉넉한 태도를 보였으며, 학문에 힘쓰는 등 자존심을 버리지 않았다. 지금까지 경제적 성장과 발전이 김해의 중요 화두였다면, 이제는 김해인으로서의 자부심이 그 자리를 메워야 할 때가 왔다고 본다. 도요의 옛 전통에서 그 자부심의 연원을 찾는 것은 어떨까?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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