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빛은 예로부터 푸르렀으니 | 山色古來碧(산색고래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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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민, 차김해동헌 고조운(次金海東軒 高祖韻)> |
홍성민은 한때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를 지냈던 고조부 홍경손(洪敬孫·1409~1481)의 시를 차운하고 있다. 첫 번째 시에서 그는 고조부를 추억하고 있다. 고조부가 왔던 이 자리에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오니 자연스럽게 그에 대한 감회가 떠올라 처연해진다는 표현이다. 그리고 두 번째 시에서는 김해의 대표적인 경관인 삼차강과 칠점산을 배경으로 솟아 있는 동헌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남쪽 나라 산하는 형승을 모았구나 | 南國山河摠勝形(남국산하총승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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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민, 次東軒韻(차동헌운)> |
동헌에서 바라보는 김해의 역사와 풍경을 읊고 있다. 직접 보이는 것은 김해의 가장 오래된 상징 가운데 하나인 제비루, 즉 연자루(燕子樓)이며, 가야를 상상하는 시인의 시청신경에 느껴지는 것은 가야금이다. 옥매화(玉梅花)가 피고 피리 소리가 저 멀리 황혼의 강 너머까지 울리니 술에 취한 듯, 가락국의 역사와 풍광에 취한 듯 시인은 깊이 젖어들고 있다. 그는 같은 제목으로 또 한 수를 읊고 있으나 다음에 감상하기로 하자.
다음은 지금의 김해시 동상동(東上洞)의 연화사(蓮華寺) 자리에 호계(虎溪) 주변의 아름다운 누정들과 함께 자리하고 있었던 김해객사(金海客舍)로 간다. <동국여지승람>에 객관은 정통(正統) 계해(癸亥·1443)년에 부의 관청 건물과 함께 화재로 소실되자 당시의 김해 부사 박눌생(朴訥生·1374~1449)이 중건하고 안숭선(安崇善·1392~1452)이 기문을 지었다고 하였다. 고려 말 전녹생(田祿生·1318~1375)은 그의 문집 <야은일고(壄隱逸稿)>에 '정당(政堂) 김득배(金得培·1312~1362)가 김해 객관에서 시를 읊어'라고 하였는데, 다음의 시가 그것이다.
분성에 와서 관리 노릇한 지 스무 해 전 | 來管盆城二十春(래관분성이십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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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득배, 제김해객사(題金海客舍)> |
김득배는 20년 전 김해에서 관리로 근무하였다고 했으니, 1337년경 그는 전녹생이 그러했듯이 마산 합포(合浦)에서 근무하였다. 이후 그는 원수(元帥)인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가 되었으나, 마지막에는 간신 김용(金鏞·?~1363)의 모함에 연루되어 효수(梟首)를 당하였다. 20년 전 당시 만났던 많은 이들이 돌아가신 것에 대해 안타까워 하는 한편 원수가 된 사실에 스스로도 놀랍다는 듯이 표현하여 세월과 인생의 무상함을 표현하였다. 그의 인생을 보면 이것은 김해의 당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닌 듯하다.
다음은 이보다 500년이 지난 조선조 말 허전(許傳·1797~1886)의 시다.
김해는 옛 수도요 | 盆城自是舊京華(분성자시구경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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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전, 차분성관판상운(許傳, 次盆城舘板上韻)> |
허전은 김해 객관의 모습보다는 김해에 들어서서 느낀 자신의 감회에 대해 읊고 있다. 김해는 가락국의 수도였으며, 그의 선조인 김수로왕과 허왕후가 탄강한 곳이다. 그는 이들이 이루어낸 가락국의 역사가 대단히 깊음을 선통기와 같다고 하고, 후손들이 대단히 번성하였음을 항하사(恒河沙)라고 하였다. 선통기는 중국 역사서 <춘추(春秋)>의 위서인 <춘추위(春秋緯)>에서 중국 고대의 역사를 구두기(九頭紀), 오룡기(五龍紀), 섭제기(攝提紀), 합락기(合雒紀), 연통기(連通紀), 서명기(序命紀), 수비기(脩飛紀), 회제기(回提紀), 선통기(禪通紀), 유흘기(流訖紀) 등 열 개로 구분한 시대 가운데 하나다. 항하사는 인도 갠지스강의 모래라는 뜻으로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수다. 시인은 주를 달아 '회로(會老)는 당의 이름이고, 초선(招仙)은 대의 이름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두 곳을 강조한 것 또한 초선대 또는 초현대가 김수로왕의 왕통을 이은 아들 거등왕(居登王)과 관련되어 있고, 회로당 역시 김수로왕의 제례(祭禮)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국여지승람>에 회로당은 '성의 북쪽에 있다고 하였으며, 홍치(弘治) 신해(1491)년에 고을 원로들이 건립하였다'고 하였다. 원래 유향소(留鄕所)로서의 기능을 하였던 곳으로, 향안(鄕案)을 보관하고 삼향임(三鄕任·좌수·좌별감·우별감)이 상시근무하던 청사이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역시 김수로왕의 후손이기도 한 김일손(金馹孫·1464~1498)의 <회로당기>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워낙 긴 글이라 여기서는 전체를 모두 인용하지 않고 요약해서 살펴보자. 이 당의 이름을 회로라고 한 것은 고을 원로들의 모임이라는 뜻이다. 지역의 원로들은 이곳에 모여서 술을 마시거나 활을 쏘고 법도를 강습하는 한편, 고을의 옛 풍습을 이어나가고 고을 사람들의 풍속을 순후하게 하는 데 앞장서는 노력을 하였다. 아울러 김수로왕을 비롯한 조상의 제의(祭儀) 때 모여서 음복하는 등 부속 건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당은 성의 북쪽에 있는데, 10년 동안 김순손(金順孫)이 오래 전에 빈 집으로 남아있던 것을 옛날에 있던 곳에 새로 세웠다.
김일손은 기문의 끝에 당시 모인 원로들과 함게 불렀던 연신가(延神歌)를 얹어두었다.
붉은 끈 땅에 드리워 | 紫纓墮地兮 (자영타지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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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전, 차분성관판상운(許傳, 次盆城舘板上韻)> |
김수로왕신의 내력을 소개하고, 원로들이 모여 회로당을 새로이 결성한 것에 대해 고유(告由·중대한 일을 치른 뒤에 그 내용을 사당이나 신명에게 고함)하는 한편 후손들이 누릴 만대의 복을 기원하는 뜻이 잘 표현되어 있다. 지금 김해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불러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듯하다.
엄경흠 부산 신라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