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경흠 신라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김해에서 소금이 생산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면 "에이! 말도 안돼! 염전을 만들 수 있는 갯벌 같은 자리가 있어야지"라고 하거나, "그래! 옛날에는 김해의 깊숙한 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으니 소금이 생산되었을 거야"라고 답이 나뉠 것이라는 상상은 전혀 나의 생각일 뿐일까?
 
높은 아파트와 공장이 들어선 명지와 녹산, 김해공항과 마을·논밭이 어우러진 대저 주변을 보면 여기에서 소금을 생산했다는 사실을 그다지 쉽게 믿기 힘들다. 사실은 필자도 김해를 공부하기 전에는 그 사실을 믿지 못했다.
 
정약용(1762~1836)은 <경세유표>에서 '나라 안에서 소금의 이익은 영남만한 데가 없다. 명지도에서만 매년 소금 수천만 섬을 구우니 드디어 낙동포(상주 지역) 가에다 염창(소금 창고)을 따로 설치하기까지 했다. 감사가 해마다 천만 섬을 헤아리고 해평(구미 지역)의 옛 현에 해마다 소금 만 섬이 오니, 소금의 이익이 나라 안에서 첫째임은 이것으로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명지가 얼마나 큰 소금의 생산지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명지는 바닷물을 가마솥에 넣고 불을 때서 소금을 생산하는 해수직자법(海水直煮法)으로 엄청난 소금을 생산하였다.
 
조선조 말의 시인 이종기(1837∼1902)는 명지의 소금 생산 풍경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명호 십리 소금 볶는 연기가 일어/ 한낮 모래밭에 열기가 한들한들 피어 오른다/ 배에 싣고 짊어지고 가기 천백 리/ 집집마다 항아리 바리때 채워지기 샘 같네'
 
당시 명지에는 소금 가마가 40개 있었다고 하니, 온 섬은 소금 굽는 연기로 자욱했을 것이다. 이렇게 생산한 소금은 배에 싣고 바다로 강으로 운반하거나 판매를 위해 짊어지고 가기도 했다. 그런데 얼마나 소금이 많이 생산되었으면 집집마다 놓인 항아리와 바리때에 소금이 샘솟듯 끊임없이 채워졌다고 표현하였을까?
 
명지에서 생산하는 소금은 정부에도 들어가고 전국으로 공급되기도 하였다. 소금이 계속해서 소비지로 나아가지 못할 경우 이를 쌓아두는 창고가 있어야 한다. 이 소금 창고가 현재의 대동에 있었다. 대동은 조선시대에 중앙 정부 및 각 지역으로 곡식 등 산물을 운송하던 조운의 핵심 지역이었다. 영조 20년(1744) 영의정 김재로는 김해 명지도의 소금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을 국가 재정에 활용하기 위하여 창고를 설치하자고 건의하였다. 이 창고가 바로 대동에 있었던 '산산창'이다. 정부 재정에 명지도의 소금을 활용할 필요를 느꼈던 일부 관리들과 명지도 소금 생산 백성들의 이해관계가 맞아 영조 21년(1745) 산산창을 설치했다. 소금은 수로로는 삼차강, 황산강을 거쳐 상주 낙동포로 해서 영남 일대로나 중앙으로, 육로로는 불암을 지나 신어천을 건너고 해반천을 건너 주촌 쪽의 덕교를 건너 지방으로 공급되었다.
 
조만강의 상류 조만천을 끼고 형성된 주촌면 천곡리에는 떳다리(뜻다리, 득교, 덕교, 부교) 마을이 있다. 이는 조선시대의 돌다리인 떳다리, 즉 덕교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덕교는 덕포에 있다. 배들이 그 밑을 지나 주촌지에 정박한다'고 적혀 있다. 1800년대 초 <김해읍지>에도 '덕교포는 부의 서쪽 10리에 있으니 바다 물결이 드나든다'고 하였다. 이를 볼 때 덕교는 김해 남쪽의 바다 및 서낙동강 등과 주촌 지역 및 서부 경남을 연결하던 중요 뱃길에 놓인 다리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조 말 시인 허훈(1836~1907)은 덕교를 건너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이렇게 읊었다.
 
'항구에 아른아른 가로 누운 무지개/ 소금 말과 나무꾼 한 길로 지나가네/ 밝은 달밤 어찌 저리 서령과 같을까/ 계수나무 연꽃 속 붉은 난간이 삼백'
 
첫 구절의 가로 누운 무지개라는 표현에서 덕교는 무지개 다리였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구절에서는 덕교의 기능을 표현하고 있으니, 오랜 세월 김해의 남쪽 바다인 명지동과 녹산동 일대로부터 생산해 바다를 통해 실어온 소금을 배에서 내려 경남 내륙 쪽으로 실어 나르던 소금 실은 말이 덕교를 지나가는 것은 당시에 아주 흔한 풍경이었던 것이다. 명지 등에서 생산한 소금은 배로 옮겨 떳다리로 가거나 산산창에 보관했다가 배로는 삼차강, 황산강을 통하여 상주의 낙동포로, 나머지는 육로로 옮겨 소비했다.
 
김해시는 고대 문화의 중요한 전파 통로로 허왕후의 신행길을 추정 복원하여 많은 행사를 하고 있다. 근래 전국적으로 유행하는 사업 가운데 하나가 '문화 테마길 만들기'다. 김해에도 여러 테마길을 만들 수 있다. 그 가운데 중요한 길을 두 개만 제시해보라면 고대 문화의 중요한 전파로로서 가락국의 김해를 이루었던 허왕후의 신행길이 그 하나요, 김해 지역 재정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며 소금의 생산과 보급을 담당했던 소금길이 하나다. 만약 허왕후의 신행길 외에 테마길을 하나 더 개발하고자 한다면, '김해 소금길'이 어떨까? 김해뉴스


외부 필진의 의견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