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고향은 경상북도 예천군이다. 그러나 삶의 대부분을 부산에서 보냈다. 그러다보니 원래의 고향인 예천군보다는 부산이 훨씬 익숙하다. 그러나 뿌리를 이야기하라면 그다지 익숙하지도 않은 예천군은 물론이요, 조상께서 터를 잡으셨던 영월까지도 반드시 언급하게 된다.
 
필자는 1996년, 부산의 풍광과 역사 유적을 노래한 한시를 문집에서 골라내 이를 해석하고, 부산의 옛 사진과 현재의 사진 및 그림 등을 함께 실은 <한시와 함께 시간여행>(도서출판 전망)이라는 책을 출판한 적이 있다. 이때 머리말에 '한시 속에서 그려내고 있는 옛 부산의 모습과 여타 많은 기록물들에 적혀 있는 부산의 옛 모습을 비교하면서 기왕의 무지에서 벗어나보려 했다'라고 적었다.

▲ 낙동강이 주는 넉넉함과 바다가 열어주는 국제 지향적 역동성 그리고 그 위에 자리 잡은 가야의 역사·문화적 가치는 현재를 살아가는 김해 사람들에게도 확대재생산 가능한 무한한 가치이자 미래의 창이다.
낙동강의 넉넉함과 국제 지향적 역동성
가야시대를 열고 맹주 위용 떨치던 가락국
그 모든 역사적 가치와 문화유산은
김해에서 살아가는 김해사람들뿐만 아니라
이 땅의 역사에서 다시 건져올려야 할
가치있는 과거이자 현재이고 미래임을 …
 
그리고 2000년에는 경주의 역사 유적을 노래한 한시를 해석하고 기타 자료들과 비교 분석하여 <한시에 담은 신라 천년의 향기>(도서출판 전망)라는 책을 내면서는 '경주는 오랜 역사 속에 신라의 수많은 사연과 흔적을 간직한 곳이다. 오랜 세월 우리의 한시 작가들은 이러한 경주의 모습에서 신라를 발견하고, 그것을 시로 읊고 있다. 그들의 시에는 신라 역사에 대한 긍정적 부정적 평가가 있어, 그들의 신라에 대한 시각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여기에는 신라인들의 삶과, 그들이 남긴 충(忠)·효(孝)·절(節)·신(信) 등 정신적 유산에 대한 이해가 있어, 그들이 꿈꾸던 이상적 인간 세계에 대한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하였다.
 
정작 가장 익숙하다고 여겼던 부산은 사실 껍질을 벗겨내는 순간 '너무나 모르고 있었구나' 하는 자각이 생겼고, 여행 삼아 몇 번을 들렀던 경주에 대해서는 마치 그 내용을 정확히 표현한 것처럼 쓰고 있었다.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생각해본다면 가장 먼저 다루어야 할 곳은 본관인 영월이요, 다음은 고향인 예천, 그리고 삶의 현장이었던 부산 순이어야 한다. 그런데도 필자는 삶의 현장인 부산을 다루고 뿌리인 본관과 고향은 빼놓은 채 여행지인 경주를 먼저 다루고 있었다. 사실 책을 쓸 때는 몰랐지만, 하나처럼 여겨져 익숙한 것에는 무심하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은 상식으로 여기는 어리석음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김해는 부산과 공항을 함께 쓰고 있으며, 경전철이나 도시철도를 이용하면 30분 이내에 통과할 수 있는 곳이다. 더구나 필자가 근무하는 신라대학교는 김해의 모든 지역을 볼 수 있을 정도의 위치에 있어 거의 매일 김해를 보면서 출퇴근을 한다. 인간적 도리가 아닌 지리적 순서로 이야기하자면 필자는 부산에 이어 바로 김해에 대해 공부했어야 했다. 그럼에도 일찌감치 김해를 공부하지 않은 것은 너무나 가깝고 항상 보이는 곳인지라 무심했던 탓이리라.
 
필자는 이 연재를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보낸 원고에서 '김해는 낙동강이 주는 넉넉함과 바다가 열어주는 국제 지향적 역동성의 바탕 위에 자리 잡았다. 이 자리에서 가야시대를 열고 강력한 맹주로 위용을 떨치던 가락국(駕洛國)은 김해의 상징이 되었다. 김해와 가락국의 관계는 김해 사람들에게는 물론이거니와 외지인들에게 있어서도 1 대 1의 공식처럼 받아들여졌다. 이는 경주(慶州)가 신라(新羅), 공주(公州)가 백제(百濟), 평양(平壤)이 고구려와 1 대 1로 성립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하였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왜 김해는 현재 경주·공주·부여·평양 등의 지역만큼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을까? 이는 두말 할 것 없이 가야가 신라·백제·고구려에 일찌감치 복속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필자가 김해에 대해 관심을 제대로 가진 것은 아마도 '구지가'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노래를 처음 접했던 것이 고등학교 시절이었는지, 대학 시절이었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다. 어쨌든 이 노래는 가야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한 중요 매개였고, 이를 통해 김수로왕과 허왕후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 유적을 둘러보고 싶은 욕구도 생기게 되었다. 이 때문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석사학위 이후 처음으로 썼던 논문이 <구지가의 어석적 연구>였다. 그러나 여전히 김해는 그다지 매력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고, 일부러 그 유적을 찾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구지가 외에 관심을 가질 만한 곳이 김해에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004년에 동남어문학회에서 지역 문학에 대한 기획의 논문을 부탁받았다. 그때 그동안 부산과 경주에 머물러 있던 시각을 김해로 돌려보기로 했고, 그 결과 발표한 것이 <김해에 대한 전통적 인식과 연자루 제영>이었다. 부끄럽게도 이때에야 비로소 김해는 구지가 외에도 오랜 세월 속에 축적된 문화유산이 있으며, 이는 한시 작가들에게 끊임없는 소재를 제공하였음을 제대로 느끼게 되었다. 2010년에는 포은학회에 <칠점산시의 양상과 정몽주의 김해 체험시>를 발표하였고,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에서는 칠점산을 중심으로 한 부산의 신선문화에 대한 기획발표를 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필자는 김해가 가진 자연 및 문화유산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 것이지를 깨닫고 본격적으로 한시로 읊은 김해를 많은 독자들과 공유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이 핑계 저 핑계, 핑계도 많아 하루 이틀 미루고 있던 차에 <김해뉴스>에서 연재를 허락해 주었다. 격주로 25장 분량의 원고와 사진을 보내야 하는 작업은 그다지 수월한 것이 아님을 그동안 글을 쓰면서 잘 알고 있던 터라서 다소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이상 미루지 말고 저질러 놓고 보자는 심경으로 연재를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했던 것이 1년 6개월이 되었다. 그동안 필자가 다루었던 한시로 읊은 김해의 역사 유적과 자연경관은 다음과 같다. 구지봉(龜旨峰)·수로왕릉(首露王陵)·허왕후릉(許王后陵)·봉황대(鳳凰臺)·초현대(招賢臺)·칠점산(七點山)·황산강(黃山江)·삼분수(三分水)·죽도(竹島)·명지도(鳴旨島)·산산대(蒜山臺)·불암(佛巖)·산해정(山海亭)·신산서원(新山書院)·남포(南浦)·신어산(神魚山)·은하사(銀河寺)·영구암(靈龜庵)·금강사(金剛社)·이세사(離世寺)·감로사(甘露寺)·흥부암(興府菴)·장유사(長遊寺)·도요저(都要渚)·호계(虎溪)·임호산(林虎山)·남산(南山)·活川(활천)·해반천(海畔川)·덕교(德橋)·첨성대(瞻星臺)·자암(子菴)·진례성(進禮城)·관해루(觀海樓)·서영지(西影池)·순지(蓴池)·다전(茶田:차밭)·타고봉(打鼔峯)·분산성(盆山城)·동헌(東軒)·객사(客舍)·회로당(會老堂)·청뢰각(晴䨓閣)·분성대(盆城臺)·함허정(涵虛亭)·하월재(荷月齋)·연자루(燕子樓).
 
처음에는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하는지가 고민이었다. 그러나 역시 처음으로 김해에 대한 관심을 갖도록 해주었으며, 김해 역사의 상징이랄 수 있는 구지봉을 출발점으로 잡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1967년에 촬영된 김해시가지 모습. 현대화와 개발의 시대 이전에는 옛 김해의 자취가 많이 남아 있었다. 김해뉴스DB
이렇게 출발한 여정의 첫 목표는 가락국의 흔적을 찾는 것이었다. 왕과 왕후의 능 및 봉황대에서는 가락국의 시작과 삶의 모습을 어떻게 시인들은 이해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고, 초현대와 칠점산 및 황산강과 삼분수에서는 김수로왕의 아들인 거등왕과 참시선인의 전설과 그 의미를 찾아보았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하나 생겼다. 왜냐하면 초현대는 행정구역상 김해에 속해 있으나, 칠점산은 오랫동안 양산 땅으로 있다가 현재는 부산에 속해 있으며, 황산강과 삼분수는 양산과 부산과의 경계가 되는 물줄기였던 것이다. 다른 지역에 속해 있거나 경계가 되는 곳을 김해의 그것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칠점산은 옛날에 김해에 속해 있기도 했으며, 나머지는 경계이므로 공유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초현대와 칠점산은 하나의 이야기로 엮여 있으며, 김해를 다루는 것은 가락국의 그것을 다루는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면 이러한 곳 모두는 가락국 즉 김해의 문화권역에 속하는 것이라고 해도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여 함께 다루었다.
 
두 번째의 목표는 김해 주변의 자연경관을 다루는 것이었다. 이는 황산강과 삼분수를 포함한 죽도·명지도·산산대·불암·남포 등인데, 여기에서도 문제가 생긴 것은 과거에는 김해 땅이었으나 현재는 부산에 속해 있는 명지도였다. 그러나 소금의 생산지였던 명지도는 대동의 산산창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곳이므로 이번 기회에 포함시켰다.
 
세 번째는 서원과 사찰을 중심으로 길을 잡았으니, 남명 조식의 거처였던 산해정·신산서원과 은하사·영구암·금강사·이세사·감로사·흥부암·장유사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장유사는 사실 두 번 등장했다. 장유사의 창건자로 알려진 장유화상은 허왕후가 가락국으로 들어올 때 함께 왔다는 전설이 있어, 허왕후릉을 다루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김해읍성을 중심으로 주변의 자연경관 및 객사, 연자루 등 옛 관청 건물을 둘러보았다.

아직 미진한 점이 있으나, 필자가 더이상 다루기에는 역부족일 것 같아 연재를 마치고자 한다. 연재를 마치기로 결심했을 때는 대단히 후련하기만 할 줄 알았지만 필자의 마음 한 구석에는 섭섭함과 미진한 부분에 대한 아쉬움 또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동안 부족한 글을 연재하도록 허락해준 이광우 사장, 글이 제대로 자리 잡도록 도와준 남태우 편집국장, 사진을 찍으러 가기가 곤란하거나 문장에 문제가 생길 때 무조건 전화로 부탁하면 만사형통이었던 김병찬 편집부장 등 <김해뉴스>의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그리고 연재된 내용을 보고 찾아와 김해를 사랑하는 마음을 여과 없이 보여준 김해의 여러 향토 학자들에게는 존경의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아울러 지금까지 그다지 재미없는 글을 김해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읽어준 독자 여러분에게도 참으로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마지막으로 하나 부탁의 말씀을 드릴 것은 너무나 가까이 있고 익숙하여 놓치고 살았던 것에 대해 필자가 반성하듯, 김해시민 여러분도 혹시 자신이 살고 있는 김해의 아름다움과 역사·문화적 자부심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줬으면 하는 것이다.





김해뉴스
엄경흠 부산 신라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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