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영식 인제대 교수.

땅은 지진으로 흔들리고, 하늘은 태풍 '차바'로 거칠었는데, 우리 인간세상은 김영란 법 시행의 혼돈으로 괜시리 어지럽다. 각중에 오래 전 일본 유학 시절의 기억 두 가지가 떠올랐다.
 
먼저 유학간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갑자기 장인어른이 돌아가셨다. 입관 전에 뵙기라도 해야겠는데, 마침 아내의 여권이 연장신청 중이어서 영사관에 묶여 있었다. 원래 정해진 기일이 못 되었지만 영사님의 배려로 겨우 사위의 체면을 지킬 수 있었다. 혹시 이른바 '급행'으로 해 주신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오히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국민 모두가 줄서기에 익숙하고 '급행' 찾아보기가 어려운 일본사회와 비교해 보는 기회가 되었다. 이런 경험은 귀국 후에 '보따리장사'의 강사생활을 2년 반이나 하면서 '안 되는 것도 없고, 되는 것도 없는 나라'라는 비아냥 섞인 인식으로 바뀌게 되었고, 부를 획득할 수 있는 기회의 공평성에 문제가 많은 나라라는 생각을 하였다.
 
다음은 유학생활에 제법 익숙해지기 시작했을 때였는데, 우리에게도 정로환으로 유명한 다이쇼(大正)제약의 사장집이 같은 동네인 것을 알았고, 그 집 며느리가 저녁 장보기로 동네 생선가게에서 우리 같은 가난뱅이 유학생과 함께 꽁치를 산다는 것에 놀랐다. 왜냐하면 그 해 다이쇼제약 사장은 토요타자동차, 내쇼날전기, 쏘니 등을 제치고 납세자 랭킹 1위로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사람 사는 사회에서 부의 재분배가 얼마나 중요한 과제인가를 피부로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한동안 "일본은 혁명 없이 사회주의를 이룬 나라"라는 나만의 해석과 선전(?)이 입버릇처럼 되었다.
 
엊그제는 일본 토쿄공업대의 오스미 요시노리(大隅良典·71) 명예교수가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본으로선 같은 분야에서 2년 연속으로 22번째의 과학 노벨상 수상이란다. 부러움과 질투심이 반반씩 뒤섞인 복잡한 심정으로 배경과 저력에 대해 나름대로의 해석이 횡행하고 있다. 요새말로 '오타쿠'라든지, '장인정신'을 얘기하지만, 나름의 하부적 토대가 보장될 수 있었던 사회 체제와 분위기가 중요하다. 사회주의라 해도 좋을 만큼 크지 않은 빈부의 격차, 곧 부의 재분배가 비교적 실현된 사회라는 게 저력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배우던 일본 교수들의 수입이 결코 상류는 아니더라도, 정치가는 말할 것도 없이 수입이 좋다는 변호사나 의사 또는 기업가와 비교해 질적으로는 그다지 떨어질 것 없는 생활이 보장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역대 노벨상 수상자들도 그랬을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연구를 계속한다고 경제적으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사회 체제 만들기와 분위기 조성이 중요하다. 그들의 학생들 또한 그 길로 나아가고 지속하기를 주저하지 않게 되는 철학은 부 축적 기회의 공평성과 균등한 재분배의 실현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김영란 법이 이른바 갑질하려는 직종들에 대한 구체적 견제방책이라지만, 법 시행에 따른 비용은 다시 서민 대중의 부담으로 돌아오고 있다. 명절 선물로 판매하던 상품들, 접대와 회식으로 장사하던 식당들, 장학이나 후원과 같은 사회활동의 위축으로 빈곤한 학생이나 봉사단체의 활동도 어렵게 되었다. 선물과 상품을 나르던 운송회사, 식당의 원자재를 생산하는 농민들의 생활도 어려워 질 것인데, 이런 업종의 침체는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의 실직으로 이어질 것이 뻔하다. 이러한 김영란 법 실행에 따라 서민에게 돌아오는 사회적 비용이 무려 10조 원에 달할 것이라 한다. 이래 가지고는 부 형성기회의 공평성과 균형 잡힌 재분배를 통한 빈부 격차의 해소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게 되었다.
 
부정 처벌의 규정 만들기에 골몰하기 전에 부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 사회적 바탕을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언제는 법이 없어서 뇌물수수 등을 처벌하지 못했었나? 중국 전국시대에 법가가 아니라 유가가 살아남았던, 그래서 상앙과 한비자가 아니라 공자가 인류의 스승으로 남았던 역사를 생각해야 한다. 인간 사회를 고치려는데 인간을 보지 않고 일정한 잣대와 기계적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로봇처럼 국민을 다루면 될 것이라는 법가적 생각은 어불성설이다. 엄한 법령으로 특정범죄를 규제하면 사회가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은 치졸하기 그지없는 대증요법일 뿐이요, 일회용 반창고의 양산에 불과하다. 어느새 법 시행 1주일에 회피를 위한 편법과 꼼수가 등장했다고 한다. 법이 아니라 보다 인간을 이해하고 사회의 근본적 체질을 바꾸려는 노력을 중심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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