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국립김해박물관 대강당에서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주최한 '금관가야 고분의 축조세력과 대외교류'라는 제목의 학술대회가 열렸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2012년 비화가야권이었던 창녕을 시작으로 함안군(아라가야), 합천군(다라국), 경북 고령군(대가야)을 차례로 돌며 가야 권역별 고분의 최신 조사·연구 성과를 공유하는 학술대회를 개최해 왔다. 이날 행사에서는 출토 유물 중심의 연구에서 벗어나 무덤 구조와 축조기술에 대해 집중 분석했다. 학술대회의 주요 논문을 요약해 정리한다.
 

▲ 지난 22일 국립김해박물관 대강당에서 '금관가야 고분의 축조세력과 대외교류' 학술대회가 열리고 있다.


각종 위세품 부장 최고지배자 무덤
복수 순장자 매장도 유일하게 확인

지배자급 규제 강화로 수혈식석곽묘 전환
멸망 때까지 주변문화 흡수·융합한 듯

나전리 토루, 감시·통제 보루성 추정
내륙 교통로에 위치, 유통 안전 역할도



■금관가야 목곽묘의 성격 / 대성동고분박물관 심재용 책임조사원
금관가야의 목곽묘(덧널무덤)는 후기 와질토기시기에 등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재용 책임조사원은 정치권력과 부가 지배층에 집중되면서 유물을 다량 부장할 수 있는 목곽묘가 등장한 것으로 봤다. 안재호 교수는 고식 와질토기 단계에서 초기 목곽묘로 이어지는 시기까지는 사회의 성층화가 진행돼 대형 초기목곽묘가 조영됐으나, 이후 묘의 조영이 현저히 축소돼 3세기대의 김해에서는 상층계층이 사라진 것으로 추정했다.
 
금관가야 전기목곽묘의 구조적 특징은 묘광의 깊이가 얕고 무덤의 바닥에는 주검받침돌을 깔지 않으며 직사각형인 장방형에 가깝다는 것이다. 대성동45호 목곽묘는 목곽 내에 내곽이나 나무로 짠 목관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후기 목곽묘의 구성요소들 중 충전토와 관상(棺床)석, 부곽, 유물의 부장위치 등은 목곽묘의 계통, 위계 등과 연관이 깊다. 금관가야의 순장배치유형은 직교, 대칭, 형행, 부곽형으로 구분된다. 최근 대성동88·91호 목곽묘에서 주피장자의 주변이 아닌 충전토에서 순장자를 매장한 새로운 순장방법을 확인했다. 순장묘는 대성동고분군과 양동리고분군에서만 확인됐다.
 
목곽묘의 면적을 기준으로 고분군간 위계를 살펴보면 대성동·양동리·망덕리·예안리 순으로 위계를 설정할 수 있다. 대형 목곽묘 중에서도 40㎡를 넘는 초대형목곽묘는 대성동고분군에만 존재하며 금동대금구, 금동운주 같은 대륙계 위세품과 파형, 통형동기 같은 왜계 위세품이 같이 부장되고 갑주와 마구류 역시 함께 부장된다는 점에서 대성동고분군의 대형묘는 금관가야의 최고지배자 무덤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복수의 순장자를 매장한 순장묘도 대성동고분군에서만 확인된다. 이를 통해 금관가야는 위계에 따른 묘제와 유물부장의 규제가 강한 사회로 대성동고분군집단과 같은 특정읍락(국읍)에 권력이 집중된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 대성동고분군 발굴 당시 모습을 복원한 대성동고분군 박물관 전시관.

■금관가야 수혈식석곽묘의 수용과 변천 /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최경규 조사단장
최경규 조사단장은 '수혈식이란 무덤의 매장 주체부 내에 시신을 안치하는 방식으로, 시신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 안치하는 종적(세로) 개념의 매장방식'이라고 정의했다. 따라서 수혈식 매장방식은 원칙적으로 추가장이 불가능한 구조다. 가야 수혈식석곽묘(구덩식 돌덧널무덤)의 개념은 직사각형의 무덤 구덩이를 파고 구덩이 내에 할석 또는 판석 등을 쌓아 곽을 구성한 후 그 외의 공간에 부장품을 배치해 영구 밀폐한 것으로 정의했다.
 
수혈식 석곽묘는 목곽을 더욱 견고히 하려는 당시 무덤 축조자의 적극적인 요구에 의해 출현했으며, 석재(石材)의 사용이 점차 발전적으로 수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금관가야는 가야제국 중에서 가장 먼저 초기국가의 단계에 진입했다. 초기국가의 특징은 사회계급이 명백히 구분되는 계층사회라는 것이다. 지배자급에서는 전통적인 목곽묘의 사용을 유지한 반면 그 아래 위계에서는 수혈식석곽묘라는 묘제로 전환되는 양상을 보인다. 지배자급에서 사용한 목곽묘의 축조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목곽묘 축조에 대한 규제를 강화함으로써 사회계급차를 뚜렷이 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중간 위계에서 수혈식 석곽묘가 출현하게 된 것으로 파악되는 데 가장 큰 배경에는 석재를 다루기 위한 철기의 발달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 다음 금관가야에서 수혈식석곽묘가 안정적인 축조가 가능해진 후 상위위계로 점차 수용된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출현 가능성으로는 자연환경적인 부분도 생각해볼 수 있다. 4세기 당시 왜는 다량의 철을 금관가야를 통해 수입했는데 수요에 따른 생간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며 철 생산의 필수물자인 목재의 소비가 더욱 증가했을 것으로 파악된다. 3세기 말~4세기 초 바닷물이 후퇴하면서 금관가야는 항구를 상실하게 되고 국력의 기본이 됐던 대외교역이 어려워졌을 것이다. 결국 금관가야에서는 재료의 수급문제로 목곽묘를 축조하기 어려워져 수혈식석곽묘로 전환되는 요인이 될 수 있었다.
 
금관가야는 4세기 후반~5세기 대에 접어들며 낙랑·대방군의 멸망으로 인해 쇠락을 맞게 된다. 이 시기 이후에 축조된 수혈식석곽묘 고분군인 김해 죽곡리고분군, 대성동 73호분 등을 볼 때 532년 멸망 때까지 주변지역의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이고 융합해 독특한 금관가야의 문화를 생성했다고 볼 수 있다.
 
■금관가야 고분 축조세력의 생업환경 / 국민대학교 김재홍 교수
대성동고분군에서 출토된 생업도구는 크게 어구와 농구로 나눌 수 있다. 어구는 낚싯바늘과 세갈래작살, 두갈래작살, 작살, 낫대 등이 있다. 삼국시대 농구는 쟁기·U자형 쇠날·괭이 등과 같은 갈이농구, 쇠스랑과 같은 삶는 농구, 호미와 같은 김매는 농구, 쇠낫과 같은 걷이농구 등이 있다.
 
대성동고분군의 묘제와 유물은 기본적으로 따비, 쇠스랑, 낚싯바늘 등 삼한시대의 생업도구를 계승하고 있다. 이곳에서 출토된 따비는 영남지역의 변화상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쇠스랑도 발이 길고 발끝이 둥글며 날 너비가 짧은 삼한시대 쇠스랑의 형태와 제작방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반면 새로이 유입된 생업 도구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중국 중원계(中原系) 농구인 일면트임쇠날과 U자형쇠날의 도입이다. 일면트임쇠날은 낙랑토성과 일본 규슈의 야요이시대 유적에서 출토되는 유물로 수량적으로 희귀한 도구에 해당한다. U자형쇠날도 한반도 내에서는 양적으로 희귀한 물건으로 외래계 도구다.
 
금관가야에서 제작된 새로운 농구는 4세기 3/4분기에 출현한다. 대성동고분군에서 출토된 U자형쇠날과 살포(水田具)는 김해 지역에서도 논농사를 본격적으로 지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같은 시기 어구에서도 새로운 형태와 기능을 가진 것이 나타난다. 이전에는 주로 낚싯바늘 등의 간단한 어구가 주류를 이뤘지만 4세기 후반부터는 세갈래작살과 두갈래작살이 나타나고 조개를 캐는 조세라는 어구도 수량이 증가했다. 이를 토대로 대외교역 중심의 생산체계에서 농업 및 어업 생산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4세기 후반 이후 생업도구에서 생겨난 변화는 단지 지배층의 무덤인 대성동 고분군에 한정되지 않고 주변 중소 고분군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김해 본산리·여래리고분군은 4세기 후반~5세기 중반경 조성된 고분군으로 금관가야 문화를 기반으로 신라와 아라가야의 문화가 들어오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4세기 후반에는 생업도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데 이는 낙랑과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었던 국제 교역망을 백제가 위협하면서 교역망의 중개지인 금관가야의 지위가 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금관가야의 특징적인 생업 도구를 자체 제작해 국가의 활력을 회복하고자 했다.
 
■김해 나전리 토루의 축조배경과 성격 / 국립가야문화재 연구소 이춘선 연구원
나전리 토루(흙을 쌓아 만든 성)유적은 김해토취장 건설로 인해 해발 182m 산 정상부에 개발이 진행되면서 우연히 발견된 유적이다. 체성의 특징과 지정학적 입지를 볼 때 성의 둘레가 117m로 소형규모의 방어적 성격이 강한 성체이다. 내부 규모가 475㎡로 상당히 협소하지만 내부에서는 거주지와 소형의 수혈유구(구덩이 유적) 등이 확인된다. 이를 통해 고지성(高地性) 집락의 성격을 가지는 유적으로 볼 수 있다.
 
성곽의 위치가 봉림고분군, 안양리고분군에 인접한 점을 봐서는 마현산성에서 마사왜성까지 하나의 방어체계가 구축된다. 따라서 나전유적은 평소에는 일상생활 공간이면서 나전현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한 보루성으로 추정된다. 나전리 토루의 연대도 출토유물로 짐작하면 5세기 후반~6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유적으로 추정된다.
 
김옥순 박사는 금관가야가 신라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기 전까지 4세기 원거리 상인이 참여하는 교역항으로서의 기능을 신라에게 넘겼다고 추정했다. 금관가야는 철광산지와 풍부한 수산물을 중심으로 한 소지역간의 교역을 가능하게 하는 2차적 지역시장으로 유지됐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나전리 토루는 김해 분지에서 낙동강 상류로 가는 최단 내륙의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는 점을 봐서 안전한 유통을 담당하는 역할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볼 수 있다.

김해뉴스 /배미진 기자 bmj@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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