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정이 판화가.

평소에 자주 만나 술잔을 기울이는 지인이 있다. 그가 당뇨 진단을 받고 금주를 하는 바람에 술자리에서 만나는 것은 물론이고 얼굴 한 번 볼 기회조차 뜸해졌다.

그랬던 그가 오랜만에 집으로 찾아왔다. 이런저런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밥 먹을 때가 됐다. 그가 '밥상을 차리느라 번거롭게 할 것 없이 밖에 나가서 해결하자'고 했다.

당뇨 환자는 음식도 가려야 한다. 적당한 밥집을 찾아가던 중 그가 차창 밖을 바라보면서 '저건 뭐냐'고 물었다. 그의 시선이 가 있는 쪽을 보니 '시민의 종' 종탑이었다. 종탑이라고 대답했더니 몹시 의아해했다. '좋은 우리 전통 종각 양식을 두고 왜 저런 시멘트 구조물이냐'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상투 틀고 양복 걸친 꼴도 꼴이지만, 맥놀이에도 안 좋을 텐데'라며 중얼거렸다. 맥놀이는 타종 후 소리울림에서 나온 원래 소리와 되돌아오는 소리가 마주쳐 서로 더해지거나 덜해지는 현상을 뜻한다. 마치 나의 무지함을 들킨 것처럼 몹시 부끄러워졌다.

적당한 밥집을 찾아 자리를 잡자 대화는 자연스레 종 이야기로 이어졌다.

종은 일종의 금속 타악기다. 범종, 악종, 경종, 시종 등 용도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다. 재질로 보면 대개 중국 종은 철로 만들고 우리나라의 종은 구리로 만든다. '학교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로 시작하는 추억의 동요에 나오는 종은 시각을 알리는 실용적인 용도를 갖고 있다면, 사찰이나 교회 같은 곳의 종은 종교 의례용이다.

타종 방식도 다 다르다. 사찰의 범종은 적합한 지점에 형성한 당좌(撞座)를 외부에서 당목(撞木)으로 쳐서 소리를 낸다. 종걸이 부분에 최소한의 힘이 작용해 여운이 길어지고 종의 수명이 늘어난다. 반면 서양 종이나 교회 종은 종신 내부에 방울을 매달아 종 전체를 움직여 소리를 내게 한다.

우리나라 종은 시대에 따라 신라식과 고려식, 조선식으로 양식이 바뀌어 왔다. 신라 종과 고려 종은 순수한 우리 선조의 창의력에서 이루어진 양식인데 반해 조선 종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혼합 양식이다. 신라 종은 음향학적 원리에 맞게 과학적인 설계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현재 우리나라에 보급되어 있는 종들은 대개 신라 종이다.

신라 종은 고리를 용머리로 하고 당좌표면에 연화문, 주악비천상, 보상화 등의 각종 문양을 새긴다. 시민의 종 같은 경우에는 도시의 상징 문양을 새기기도 한다. 이러한 문양은 장식적인 효과를 내기도 하지만, 문양 크기와 배치에 따라 다른 두께와 질량 때문에 각기 다른 주파수를 내고 부분음들이 합쳐져 합성음을 만들어 낸다.

특히 우리나라 종에만 있는 독창적인 부분은 바로 종 상부에 있는 음관과 종구 바로 밑에 있는 명동(鳴洞)이다. 음관은 종의 음질과 음색을 정하는 기능을 한다. 어느 나라 종보다 우리나라 종은 맑고 뚜렷한 소리를 낸다. 적절한 주기의 맥놀이가 맑고 긴 여운을 낸다.

종은 일종의 타악기이고, 종소리는 음악이다. 예악사상에서는 악기를 연주함으로써 종교적 발원을 기원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음악이 사람들의 성정을 순수하게 한다고 본다. 성정이 순수해지면 도덕이 순화되고, 바른 정치에 이바지하게 된다는 것에 방점을 둔다.

<악학궤범>에는 '종소리야말로 높은 세계의 뜻을 아래로 전하고 아래 세계의 뜻을 높은 세계로 전하는 매개체'라고 돼 있다. 이는 임금과 백성, 사람과 사람 간의 소통을 넘어 사람과 자연 간의 소통과 조화를 의미한다.

대통령을 뽑는 투표일이 며칠 안 남았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나라의 미래와 우리의 삶에 여러 모로 영향을 미친다. 잘못된 선택은 나라를 어지럽히고 국민들의 삶마저 피폐하게 만든다. 낭패의 학습은 할 만큼 했다. 이제는 잘 뽑아야 한다.

종에 빗대자면 누가 좋은 종인지, 누가 좋은 종소리를 낼지를 잘 가려야 한다. 그래야 예악사상이 일컫는 순수성과 <악학궤범>이 일컫는 소통이 잘 되는 좋은 세상이 열린다. 맑은 종소리가 울리는 나라를 위해 이번에는 정말 투표를 잘 해야 한다.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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