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첫 북큐레이터 작업 이야기
옛 분류법 대신 키워드 방식 활용



일본 도쿄에 있는 레스토랑 '브루클린 파라 신주쿠'에는 대형 책장이 한쪽 벽면 전체를 차지하고 있다. 압도적인 규모만큼이나 눈에 띄는 건 책장에 꽂힌 책의 분류 방식이다. '연애와 사랑 이야기', '운동합시다', '여행을 떠나자', '가까운 과학' 등 색다른 주제어별로 2500여 권의 책이 정리돼 있다. 분야에 상관없이 오직 주제 연관성에 따라 소설, 만화, 사진집, 단행본, 잡지 등이 한 칸에 어깨를 나란히 한다. 책의 높이는 들쭉날쭉하고, 책등이 아닌 표지가 앞으로 향한 책들도 있다. 이 역동적인 분위기의 책장은 세계 최초의 북큐레이터(책장 편집자) 하바 요시타카의 손길이 만든 '작품'이다.

하바는 북큐레이션 분야를 개척한 인물이다. 미술관이나 박물관 큐레이터가 전시를 연출하듯, 특정 주제에 맞게 책을 선별하고 책장을 편집해 독자들에게 선보인다. 일본 작가 다카세 쓰요시는 <책의 소리를 들어라>에서 하바의 북큐레이션 철학과 그의 손길을 거쳐간 공간을 소개한다.

하바는 기존 서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분류법을 따르지 않는다. 장르별, 작가별, 출판사별 따위의 분류로는 더 이상 독자의 마음을 열 수 없다는 생각에서 공간과 이용자의 특성에 따라 자유자재로 맞춤형 분류를 시도한다. 예를 들어 미용실의 책장에선 '꾸미다', '스타일', '식생활의 중요성', '아이들에게 멋진 삶' 등의 주제어를 꼽는다. 주 고객인 여성들의 관심사와 지적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키워드다. 구체적인 아이템 조합에는 더욱 얽매임이 없다. 소설 <1Q84>와 이 책 첫머리에 등장하는 음악인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 음반을 나란히 전시하는 식이다.

맞춤 책장 편집을 위해 하바는 작업에 앞서 공간의 특성을 파악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관리자나 손님들과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며 해당 공간에 어울리는 책을 선별한다. 재활병원에서는 시집 같은 짧은 글 위주의 책과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사진집으로 환자들의 재활 의지를 돕는다. 스루가은행의 라이브러리 '디라보'에선 '꿈의 실현'이란 은행의 새로운 존재 가치에 주목해 '꿈', '환경', '돈' 관련 책을 집중적으로 배치한다.

하바의 작업 밑바탕에는 '사람들이 서점에 오지 않는다면, 사람이 있는 곳으로 책이 찾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서점에서 처음 시작한 그의 작업이 대학교 북카페, 미용실, 병원, 은행, 레스토랑, 스포츠용품 매장 등 다양한 공간으로 확장되는 이유다. 그는 우리나라에서도 3년 전 현대카드 '트래블 라이브러리'의 북큐레이션 일부를 맡은 인연이 있다. 서점과 점원의 이야기를 다룬 한 영화에선 영화 속 서점의 '책장 만들기'를 담당하기도 했다.

전자책 분야도 큐레이션 대상이다. 하바는 소니의 전자책 온라인 가게인 '리더 스토어'에 참여해 온라인 페이지상에 책을 진열한다. 그는 '세상에서 책과 접할 기회가 확산된다는 점'에서 전자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하바는 정보와 책의 세계를 '빙어 낚시'에 비유한다. 현대인들은 정보가 필요한 순간마다 구멍을 뚫어 정보를 길어 올린다. 구멍들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나 얼음 아래로 이어진 바다에는 다양한 생물이 공존한다. 인터넷서점을 통해 원하는 책을 손쉽게 찾을 수 있게 된 건 고마운 일이지만 목적없이 서점을 배회하다 책장에서 골라잡게 되는 '우연한 만남' 역시 필요하다. '빙어 낚시'로는 결코 알 수 없는 '지식의 확장'인 셈이다.

하바의 꼼꼼한 손길을 거친 책장은 단순히 책 진열장의 역할을 뛰어넘는다. 책장은 하나의 세계가 되고, 한 권 한 권의 책이 독자에게 말을 걸어오는 경지에 이른다.

하바가 전하는 북큐레이션 이야기는 도서관 사서, 서점 MD, 작은책방 운영자 등 책과 관련된 직군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가가호호 책장을 찬찬히 살펴보면 공간, 가족, 사람의 관심사와 시간의 궤적이 칸칸이 펼쳐진다. 어떤 책으로 어떻게 책장을 채웠는가는 책장 주인의 정체성이자 삶 자체다. 나의 책장은 어떤 주제어로 묶일 수 있을까. 서점에 들르기에 앞서 한 번쯤 책장을 정리하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봄 직하다.

부산일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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