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하공원 400년 묵은 은행나무와 임진왜란 때 김해성을 지키다 순절한 유식 선생 가문의 문화유씨세적비.
내외동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경운산에서 내외동 돌아보기를 시작하려 한다. 경운산(378m) 등산의 들머리로 남쪽의 주촌고개와 북쪽의 동신아파트가 있고, 그 사이에 경운사나 수인사 뒤편으로 오르는 길도 있다. 전망대에 오르기 가장 쉽다는 수인사 뒤쪽 길을 택했다. 수인사 가는 아스팔트 비탈길 끝에 화살표 모양의 이정표가 정상, 주촌고개, 동신아파트까지의 거리를 알려주고 있지만, 우선 연못 위에 놓인 시멘트 다리와 계단으로 수인사에 오른다. 와우산(臥牛山)수인사(修仁寺)의 편액을 단 문루에 들어선다. 좌우에 사천왕을 그렸으니 사천왕문이겠지만, 앞뒤에 있어야 할 일주문이나 해탈문도 없고, 좌우에 붙은 긴 강당은 보통 절집과 많이 다르다. 계단 끝에서 퍼지는 예쁜 잔디밭은 일본 절을 연상케 할망정 우리 절집에는 없는 마당이다. 대적광전(大寂光殿)이라 쓴 법당은 고요할 적(寂), 빛 광(光)이니, 탈 세속의 고요 속에서 지혜의 빛을 발하는 진리의 부처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다. 화엄경의 비로자나불이니 화엄종 사찰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리라.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조선 전기까지 이곳의 운참사(雲站寺)를 전하고, '김해읍지'는 무오사화(1498년)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사림파를 대표해 연산군에게 능지처참 당했던 김해김씨 김일손이 운참사의 승려 지즙(智楫)에게 보냈던 편지를 실으면서, 편찬 당시인 1630년경에 이미 폐해졌음을 기록했다. 이후 허씨 삼형제가 학업을 위해 삼우정(三友亭)을 세웠다가, 과거급제의 희망을 담았던지, 기쁠 경(慶)의 경운제로 고쳤고, 이때부터 산 이름도 경운산으로 바뀌었다. 불교의 머무를 참(站)이 유교의 기쁠 경(慶)으로 변했다고나 할까? '구름이 머무는 산'이 '기쁜 구름의 산'으로 바뀐 셈인데, 여러분은 어느 쪽이 마음에 드십니까?
예전의 삼우정은 바로 옆 수인사 유치원 옥상의 정자로 되살려졌고, 이후의 사연은 법당 왼쪽의 무옹대선사사리탑비문에 새겨 있다. 비문에는 속명 허창동(許昌銅), 김해군 이북면 신천리 출생의 무옹대선사(無翁大禪師)가 병약해 요양여행 하던 중에 금강산 건봉사에서 화엄경을 접하면서 병이 낫자, 1942년에 서울 강학원의 효봉선사에게 출가했고, 한국동란 중인 1952년에 대장경 1질을 짊어지고 귀향해 1954년에 수인사를 창건했다고 새겨져 있다. 원래 5층 석탑과 다른 데서 모셔 온 석불좌상이 있었으나, 석불은 10년 전쯤에 도난당했다 한다. 가까워진 수능 때문인지 아침부터 법당과 칠불보전에 절하며 치성드리는 부인네들이 적지 않다.
 
▲ 수인사 유치원 옥상에 정자로 되살려진 삼우정.

언젠가는 학부모들이 서로 입학원서를 받으려고 새벽부터 줄서기도 했다는 수인사 유치원 사이로 난 박석 깔린 길을 따라 산에 오른다. 계곡을 지그재그로 기어오르는 길이라 제법 가파르고, 아침햇살 받는 동쪽 사면인데도 그늘과 습기에 좀 어둡고 눅눅하다. 서두르지 않아도 20여분 정도의 걸음이면 찬란한 햇빛이 부서지는 능선 길에 오르는데, 왼쪽으로 주촌고개, 오른 쪽으로 체육공원과 동신아파트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있다. 오른쪽으로 몇 걸음가지 않아 2단으로 만들어진 목재의 전망데크에 이르는데, 내외동 주민들이 매년 새해 첫날 새벽에 모여 해맞이 하는 곳도 이곳이다. 역광에 눈을 가늘게 뜨고 아래를 내려다본다. 해반천 위로 소꿉장난 같은 경전철 차량이 오가고, 노르스름한 띠 같은 경전철 선로는 시내와 내외동을 횡선으로 갈라놓고 있다. 그 경계선 아래쪽의 내외동 마을은 왼쪽에서부터 연지공원의 호수를 꼭지점으로 하고, 오른쪽의 임호산과 함박산을 밑변으로 하는 이등변 삼각형 같은 인공의 공간이다. 잘라 놓은 한 조각의 치즈나 케이크처럼 생긴 마을이다. 조선시대까지도 해반천을 통해 옛 김해만(김해평야)의 바닷물이 들고 나는 갯벌이나 습지 같은 곳이었는데, 토지개발공사가 1986년 12월부터 습지를 메우는 택지조성공사로 지금의 거대한 아파트 숲을 이루었다. 건축초기에는 주민들이 입주해 있는데도 계속되는 잔여지반 침하로 아파트 동 사이의 아스팔트 포장이 갈라지며 떠올라 차가 덜컹거리며 다닐 때도 있었다. 당초 11만 명의 신도시로 계획되었으나, 2011년 9월 현재 8만7천558명(남 4만3천672, 여 4만3천886)의 시민이 거주하고 있다. 예전의 필자처럼 시내에서 가까운 쪽을 내동, 먼 쪽을 외동으로 혼동하는 '에이리언' 들도 많지만, 여기서 내려다보면 산에 가까운 곳이 안쪽이라 내동이고, 산 바깥쪽 마을이 외동으로 되었음이 쉽게 이해된다. 1981년 7월 김해시로 승격되면서 내동과 외동을 합해 내외동이 되었다. 아파트 숲과 단독·연립주택들, 문화의전당과 휴앤락 같은 대형건물, 공터처럼 남은 시외버스터미널과 임호산이 손에 잡힐 듯하고, 임호산과 함박산 너머로 펼쳐지는 황금색 들판이 투명한 가을빛에 따뜻하게 빛나고 있다.
 
▲ 가야초등학교 앞 은행나무길.

발길을 돌려 남쪽 주촌고개를 향해 산을 내려간다. 2.2km의 짧지 않은 거리지만, 대부분이 내리막길이라 발길도 마음도 모두 가볍다. 왼쪽으로 시내를, 오른 쪽으로 주촌의 선지마을을 내려다보며 걷는 능선 길에 마침맞게 불어와 겨드랑이를 간질이는 가을바람에 날개라도 돋칠 듯 양팔이 절로 휘둘러진다. 6분 정도에 작은 정자가 있는 체육공원을 지나고, 7~8분 정도에 경운사 내려가는 갈림길의 이정표를 만난다. 5분 정도에 드물게 보는 큰 바위들이 나타나 그 앞쪽 건너로 장유가 보이기 시작한다. 10분 정도에 근처 잡석을 원통모양으로 쌓아올린 돌무덤이 성황당처럼 임호산과 함박산 자락의 아파트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가파른 내리막길이 시작되지만 풀린 다리를 위해 난간이 있는 철제 계단이 친절하게 놓여 있다. 10분 정도에 가야초등학교로 내려가는 이정표를 만나고, 다시 10분 정도에 초대 도의원 이모 씨의 무덤을 지나면, 시내 뒷산 어디에나 있는 예비군 진지 하나가 등장한다. 이제 다 내려 왔다는 신호다. 빠르지 않은 필자의 걸음으로도 1시간 20여분 정도의 산책이면 일동한신아파트(1999.12, 1천740세대) 앞 분성로에 내려설 수 있다. 오른쪽의 주촌고개는 선지고개라고도 하고, 외동고개라고도 하는데, 주촌면 선지리와 시내 외동의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달렸을 것이다. 과거에는 시·군의 경계가 되었던 곳으로 시내에서 서쪽으로 나가는 유일한 고개였고,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여러 가지 이름이 붙었던 모양이다.
 
▲ 내외동 최초의 아파트단지인 외동주공아파트.

주촌고개 바로 아래에는 내외동 최초의 아파트단지였던 외동주공아파트(1988, 6천920세대)가 있다. 곧잘 주공1단지로 불리는 단지에는 요즘엔 보기 어려운 5층짜리 아파트 여러 동이 자리하는데, 많이 낡아 불편을 호소하는 주민도 있겠지만, 아담한 높이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풍성한 녹색은 유럽의 어느 주택단지 같은 느낌도 있다. 아파트 정문 앞의 상가는 이웃의 동성아파트(1991. 1천490세대)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이제 막 학교가 파해 기웃거리며 지나오는 아이들로 제법 활기를 띠고 있다.
 
동성아파트 정문 앞의 은하공원에는 지난 세월과 마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흔적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시의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400년 묵은 은행나무고, 또 하나는 임진왜란 때 김해성을 지키다 순절하신 유식(柳湜)선생 가문의 문화유씨세적비(文化柳氏世蹟碑)다. 문화유씨가 대대로 살아왔던 내력을 적은 비문에 따르면, 문화유씨 17세손인 유용(柳墉)이 양산군수로 퇴관한 뒤 이곳 거인리(居仁里)에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 입구에 심었던 은행나무가 지금 비 앞에 서 있는 은행나무의 노거수이고, 임진왜란 때 김해의 사충신이 되었던 유식 선생이 그 집 손자였음을 전하고 있다. 1987년 여름에 세워진 국한문혼용의 이 비석은 덧칠한 시멘트 때문에 조금 쇠약해 보이긴 해도 400년 풍상을 이겨내고 여전히 푸른 잎을 달고 있는 은행나무와 짙은 역사의 향기를 뿜어내고 있다. 은행나무 아래의 정글짐에 매달리고 놀이터를 뛰면서 목청껏 떠드는 아이들 소리의 콘트라스트가 꿈결처럼 아득하다. 아래쪽 동성아파트 삼거리 건너에 있는 거인공원의 이름도 거인이 노는 공원이어서가 아니라, 머물 거(居)에 어질 인(仁)이니, 인자한 이가 사는 마을이란 땅이름을 잇는 것이었다.
 
재잘거리며 흘러내려오는 아이들 물결을 거슬러 가다 보니 동성아파트 위의 가야초등학교에 이른다. 2000년 3월 개교해 35학급 1천15명의 학생들과 24명의 유치원생들이 6대 안병용 교장 이하 75명 교직원들의 가르침을 받고 있다. 노란색 교사는 아담한데 운동장 한쪽에 장막처럼 내려진 거대한 시멘트옹벽은 어떤 아이들을 키우겠다는 건지 절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정문 앞 가로수의 키 큰 은행나무 대열에 노란 물이 들면 참 예쁘겠다고 생각하며 위쪽에 있는 경운사를 찾아 간다.
 
▲ 경운사 경내 모습과 다보탑 모양의 사리탑. 이 탑에는 부처 치아의 진신사리가 봉안돼 있다.

얼마의 아스팔트길을 올라가 만나는 4단의 흰색 대리석 계단 위에 극락보전(極樂寶殿)이 있는데, 극락을 보여주던 아미타부처가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거느리고 앉아 있다. 아미타신앙을 통해 현세의 행복과 극락을 추구하려는 도량인 모양이다. 지난해 스리랑카에서 들여온 부처님 치아의 진신사리를 봉안했다는 다보탑 모양의 사리탑이 있는데, 여기서 극락전 기와지붕 너머로 보이는 시내 풍경이 그럴듯하다. 사리탑 연기문 뒷면에 새긴 청평스님의 행장과 극락전 왼쪽의 권명례공덕비에 따르면, 속명 한정관의 청평스님이 시주 권명례 보살과 함께 지성암을 창건했다가 1980년 9월에 경운사로 개명했다고 한다. 역시 수인사 같은 잔디마당이 마음에 걸린다. 이 동네 유행인가?
 
절에서 내려온 길 끝에 원불교 서김해 교당이 있다. 1987년 서김해 포교를 시작으로 1997년 5월 지금의 교당을 낙성했다. 문신원 교무가 설법하는 일요일 법회에는 50여명의 신도들이 출석하고, 부설의 원광유치원에서는 4개 반 40여명의 원아들이 활기차게 자라나고 있다. 대성동 김해서중의 신축이전을 위한 공사현장을 지나 새 포장의 도로를 따라 가면 금년 3월에 개교해 이제 자리 잡기 시작하는 김해제일고등학교가 있다. 10학급 309명의 신입생이 초대 백종철 교장 이하 29명 교직원들의 가르침을 받고 있다.
 
갓 태어난 제일고 아래쪽에는 80년 전통을 자랑하는 최고참의 김해생명과학고등학교가 있다. 일제강점기 1927년 5월 5일에 김해공립농업학교로 개교했다가 한국동란 직전인 1950년 5월에 김해농업고등학교로 승격했다. 그 후 반세기 동안 김해의 명문고로 성장해 오다 세월의 흐름에 밀렸는지 2006년 3월에 김해생명과학고등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웬만한 전문대 캠퍼스 뺨치는 2만여 평의 교사와 운동장, 그리고 실습지와 금관대로 건너의 축구전용구장은 4개과, 10개반 소속의 881명(여278) 학생과 28대 윤병철 교장 이하 81명의 교직원들이 함께 배우고 가르치기에 넉넉하다. 마침 음악시간인지 학생들의 합창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국화와 화초를 매만지고, 야생화 씨앗과 난 균 배양에 몰두하며, 농기계를 조작하고, 말을 관리하며, 애견과 조류를 다루는 학생들의 눈과 몸짓이 생기에 가득하다. 교기로 하는 축구부는 올해에도 이미 전국고교축구대회 3위, 경남도민체전 준우승의 성적을 거둘 정도로 언제나 고교축구 강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배출된 졸업생이 1만7천133명을 헤아리는데, 김종간 전 김해시장, 노계현 전 창원대 총장, 조장환 전 단국대 총장, 아시안게임 장대높이뛰기 3연속 메달리스트 홍상표 육상경기운영본부장, 동방그룹 김용대 회장 등의 이름이 세간에 오르내리고 있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김해농고'의 국화전시회가 이번 달 28~30일에 개최된다고 한다. 이 학교의 국화전시회는 김해시민의 연중행사와도 같기에, '매화 피는 김해의 봄은 건설공고에서 오지만, 국화 피는 김해의 가을은 김해농고에서 온다'는 말 하나를 만들어 본다.






이영식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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